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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취향

[정태춘과 그의 음악세계]_01. 시인의 마을에서 내려온 한국의 밥 딜런

by 양조휘 2023. 10. 27.
호머의 독서(1885), 로렌스 알마 타데마.

 

정태춘의 1집 시인의 마을(1978) 앨범표지.

 


태초에 모든 가수는 시인이었다. 고대 희랍(希臘)과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吟遊詩人)들은 영웅의 모험담과 운명의 비극을 소재로 한 대서사시를 훼손과 망각 없이 대중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각기 다른 선율을 덧붙여 노래했다. 태고의 가수들이 멜로디를 담아 발화하는 어휘 하나, 문장 하나에 대중들은 대자연의 신비와 만나기도 했고 천일야화의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노기 띤 국왕과 귀족들을 떠올리며 박장대소를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정태춘이야말로 그런 음악의 시적 원형을 체현하고 있는 가수이다. 정태춘의 가사에는 어지러운 관념과 추상이 없다. 정태춘이 다루는 것은 오직 오감과 경험, 현실이 뿜어내는 정서적 분비물들이다. 시인이란 그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라고 하였던가. 1집 [시인의 마을]을 통해 데뷔한 정태춘은 미국풍의 번안곡과 팝송의 범람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잃고 있던 한국 음악계에 가수란 본래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는 듯 완성도 높은 노래를 선보였다. 여기에 더해, 같은 1집 수록곡인 [촛불] 역시 특유의 처연하고도 절제된 로맨티시즘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둬 현재의 중장년층에게 사랑받는 연가(戀歌)를 지닌 대중가수로 그를 기억되도록 했다. 훗날 한국의 밥 딜런(Bob Dylan)이라고 불리게 되는 음유시인 정태춘은 그렇게 시인의 마을에서 하방 하여 우리 곁에 찾아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TnqaKBo7PQ0

정태춘의 1집 타이틀곡 시인의 마을(1978).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편곡 유지연
장르 포크/블루스
 

창문을 열고 음-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당신의 텅 빈 가슴으로 불어오는 더운 열기의 세찬바람

살며시 눈 감고 들어봐요 먼 대지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 가쁜 벗들의 말발굽소리

누가 내게 손수건 한 장 던져 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얹져 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에 장단을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빗긴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우산을 접고 비 맞아봐요 하늘은 더욱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서

당신의 그늘진 마음에 비뿌리는 젖은 대지의 애틋한 우수

누가 내게 다가와서 말 건네 주리오. 내 작은 손 잡아 주리오

누가 내 운명의 길동무 돼주리오 걸인시인의 벗 돼주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빗긴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1. 시인의 마을

시인의 마을은 속세의 홍진(塵)에 가려 잊혀진 우리들의 순수한 내면세계를 의미한다. 그 세계에서는 고독도 방황도 번민마저도 내가 살아서 느끼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즐겁고 행복한 체험이 된다. 감각 그 자체가 행복의 충분조건인 세계에서 시인은 우산을 접고 비에 흠뻑 젖기도 하며, 탈춤의 장단을 추기도 하면서 내면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정태춘의 노래에는 내면이라고 하는 가장 오래된 벗들이 사는 시인의 마을을 발견한 희열을 나누고자 속세로 내려온 음유시인의 넉넉함이 느껴진다. 오감의 신비를 온전히 언어로 풀어낸 그 가사와 자신의 감정과 순수한 바람을 털어놓는 담백한 작법이 이 노래의 묘미이다.

물론 시인의 감성적 촉수가 누구보다 예민하듯 불온함을 포착하는 통치자들의 동물적 직감 또한 뛰어난 법이다. 아직 정태춘의 음악이 공권력과 지배세력의 저항하는 투사적 성격을 띠기 이전에도 겨울 공화국의 위정자들은 그의 가사가 지닌 솔직함을 삐딱함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시인의 마을]은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시행한 음반사전심의제도에 따라 일부 가사가 개작되는 수모를 겪었다. 고독과 방황은 자연과 생명으로, 번민과 방랑자는 차세계와 수도승으로, 심지어 탈춤과 같은 토속적 어휘도 무의미하게 생명으로 고쳐져야만 했다. 때 묻지 않는 순수와 서정은 그 상상만으로도 권력과 탐욕의 분노를 자아내는 것일까. 향후 그의 음악세계를 중대하게 바꿔놓은 공윤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8bT4_GXTE

정태춘의 1집 수록곡 촛불(1978). 처연하고 절제된 로맨티시즘이 독보인다. 개인적으로 정태춘의 1집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곡.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편곡 유지연
장르 포크/블루스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창가에 촛불 밝혀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못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사랑은 불빛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못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사랑은 불빛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못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2. 촛불

촛불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광원(源)으로서 가장 오랜 기간 인류에게 빛의 상징물이었다. 이미 곡이 발매된 1970년대 후반이면 비추고 밝히는 그 실질기능은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은 촛불이 지닌 영성적, 제의적 기능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결과를 내었다. 촛불이 지닌 의지와 희망의 정서의 기저에는 나약함과 위태로움의 정서가 깔려있다. 그로써 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가고 싶어도 여기저기 반사되고 굴절되어 나에게로 돌아오는 촛불의 정서는 외사랑의 괴로움과 맞닿는다.

외사랑의 괴로움을 촛불의 심상으로 표현한 [촛불]의 가사는 외려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창가에 밝혀놓은 촛불을 계속 타게 하는 것은 외로움, 불빛 아래에서 흔들리면서 식지 않는 미련. 정태춘이 말하는 사랑은 저잣거리의 상열지사가 아니라 유배 간 신하가 보이는 군신 간의 사랑, 처형대의 순교자가 노래하는 신에 대한 사랑에 가깝다. 이 사실은 정태춘의 후기 음악과 생애가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한국의 사회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과 함께 의미심장한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처연하고 절제된 로맨티시즘이 인도하는 시인의 사랑얘기를 들어보시라.


 
https://www.youtube.com/watch?v=r8RmYpn_eDk

정태춘의 4집 타이틀곡 떠나가는 배(1984). 2집과 3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한 후에 나온 앨범의 수록곡으로 특유의 음악세계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킨 그의 음악적 고집과 일종의 작가주의가 엿보인다.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편곡 이정선
장르 포크/블루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바람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3. 떠나가는 배

떠나가는 배는 정태춘의 음악에 자주 등장하는 헤어짐과 떠나감의 서사를 대표한다. 그것은 정태춘의 음악세계가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에 대한 향수처럼 보이나, 그 본질은 농경사회 자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이상세계로의 회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언제나 미래세계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두고 온 곳, 어쩌면 잊혀진 곳에 대한 영원회귀의 성격을 지닌다. 다분히 불교적이고 원시적인 이상처럼 보이는 이 노래의 진행은 듣는 이로 하여금 생과 사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하며, 음악을 매개로 한 도피 혹은 초월이라는 문학적 딜레마를 나타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떠나가는 배]를 통해 정태춘은 2,3집의 대중적 실패를 딛고 작가주의적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로서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하게 된다. 한 척의 나룻배를 타고 평화와 무욕의 땅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상상하며 그러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