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이상주의자는 지나간 시대에 대한 회한과 다가오는 시대에 거는 희망을 노래한다. 세기가 바뀌고, 시대가 교차하는 1990년대 세기말에, 정태춘은 외환위기가 초래한 신자유주의적 각자도생의 새천년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을 목격한다. 이상향을 향한 투쟁의 섬광으로 정태춘을 깨웠던 대학가는 어느새 기득권에 편입되길 바라는 소시민들의 공간이 되어 있었고, 해체된 진보적 담론과 내면화된 경쟁사회는 그를 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여정을 함께 해오던 동지들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노풍(盧風)이 가져온 주류교체의 바람을 통해 권력은 시민으로 넘어갔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정태춘의 눈에 권력은 군부독재에서 자본독재로 이양되었을 뿐이었다. 한때 그를 움직였던 세상에 대한 분노와 갈망은 혼돈과 회의, 아이러니로 변해갔다.
조로증에 빠진 듯 급속도로 늙어버린 시대와 침잠하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정태춘의 음악은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공명의 대상을 잃어버린 정태춘의 음악에서 현실의 캄캄함은 생생하고 이상을 향한 희망은 막연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세상을 관조하는 목격자의 시선은 언제나 잊히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 있으며, 부정과 극복의 의지는 여전히 깨어있다. 자칫 냉소와 무력감으로 빠지기 쉬운 이 양가적 감정은 서정과 저항의 미학적 변증이라는 정태춘 특유의 작법을 통해 예술로 승화된다. 나는 그의 음악이 저물어 가는 20세기의 유물들과 낯설기만 한 21세기의 사회상을 절망과 희망을 넘나드는 시사적 서정성으로 표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교체기에 나온 두 앨범을 통해 정태춘은 순수와 참여 사이의 딜레마라는 문학의 영원한 난제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내놓은 듯하다. 음악 인생 만년(晩年)에 앨범들을 발매한 정태춘은 예술가는 대중으로부터 유리되더라도 끝까지 이상주의자로 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에 나온 정태춘의 앨범들이야말로 내가 가장 지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음악이다. 치열했던 당사자에서 관조하는 주변인으로 돌아온 정태춘이 증언하는 우리 시대의 진실을 들으며 부디 세상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끝자락을 발견했길 바란다.
1998년에 발매된 정태춘의 9집 <정동진/건너간다>는 그의 가수 인생 2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이자, 구 시대의 산물이었던 대중가요에 대한 사전심의가 위헌 판결을 받은 뒤 창작된 최초의 작품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 [건너간다]에서 정태춘은 곡이 발매되기 한 해 전 벌어진 IMF 국가부도 사태를 겪으며 추락하는 세기말의 한국 사회와 무기력한 사람들의 모습을 달리는 열차 속 회한의 정서로 표현하며 영욕의 20세기와 작별을 고한다. 한편, 2002년에 발매된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 정태춘은 사회적으로 은폐되고 무관심해져 가는 소외와 차별, 불평등의 문제를 담담히 관조하면서, 그 안에도 언젠가 찾아올 희망의 21세기에 대한 바람이 남아있음을 노래한다. 앨범에 수록된 4개의 곡인 [동방명주 배를 타고], [아치의 노래], [리철진 동무에게],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는 시대를 관통하는 그 진정성을 시인의 언어와 운동가의 문제의식을 통해 엮어낸 대표적인 노래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5IciZkPcg9c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편곡 최성규
장르 포크/블루스
강물 위로 노을만 잿빛 연무 너머로 번지고
노을 속으로 시내버스가 그 긴긴 다리 위
아아 흐르지 않는 강을 건너
아아 지루하게 불안하게
여인들과 노인과 말없는 사내들
그들을 모두 태우고 건넌다
아무도 서로 쳐다보지 않고 그저 창밖만 바라볼 뿐
흔들리는 대로 눈감고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아아 검은 물결강을 건너
아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깊은 잠에 빠진 제복의 아이들
그들도 태우고 건넌다
다음 정거장은 어디요
이 버스는 지금 어디로 가오
저 무너지는 교각들 하나둘 건너
천박한 한 시대를 지나간다
명랑한 노랫소리 귀에 아직 가물거리오
컬러신문지들이 눈에 아직 어른거리오
국산 자동차들이 앞뒤로 꼬리를 물고
아아 노쇠한 한강을 지나간다
휘청거리는 사람들 가득 태우고
이 고단한 세기를 지나간다
1. 건너간다
정태춘의 가사에는 유난히 배, 열차,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자주 등장한다. [건너간다] 역시 그 대표적인 경우다. 불특정 다수의 서민 대중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공간에 모였다가 구간마다 쪼개져 있는 정거장마다 승/하차를 반복한다. 현대의 많은 문학들이 그랬듯 음악은 파편화되고 단절된 개인들로 가득 찬 세기말의 한국 사회를 묘사했다. 버스 안에 여인들과 노인, 말 없는 사내들은 서로 쳐다보지 않고 라디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강과 무너지는 교각들만이 그들이 보는 창밖 세상의 풍경이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자축하며 호사스러운 치장과 미화로 도금되어 있던 우리 사회의 경제적 풍요가 허무하게 무너진 절망의 시대를 노래는 담담히 쫓아간다. 버스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물어도 대답해 줄 이는 없고 그저 지루하고 불안하게 나아가기만 할 뿐. 이미 매판자본과 물신주의가 범람하던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경고한 정태춘에게 왜 환멸의 감정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절망의 절벽은 지나는 버스 안에서 명랑한 노랫소리와 컬러신문지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버스는 제복의 아이들과 휘청거리는 사람들,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다음 정거장으로 출발한다. 그는 천박했던 90년대에 대한 환멸감에 머물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고 고단한 시대를 멈춰 서지 않고 건너간다는 연민의 정서로 버스가 달리는 이유를 받아들인다. 마른기침이라도 한 번 뱉었으면 좋겠다 싶은 답답한 보컬의 멜로디와 첼로의 묵직한 선율이 창밖의 암울한 풍경과 시내버스에 탄 표정 없는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느껴지게 하는 곡이다.
이 노래가 발매된 지 근 25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90년대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2010년대부터 본격화된 이른바 복고적 유행들의 정점에 90년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가 있다. X세대가 누렸다는 사상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그 시절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 등은 마치 문화의 요/순시대인냥 추앙받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90년대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가자던 88년 올림픽의 이면에 역사상 두 번째로 많았던 강제 철거민과 거리 부랑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 않듯, 시대를 회고하는 우리의 기억은 공평하지 않다. 이 불편한 진실은 90년대에 대한 우리의 회고가 결국 우리 시대의 결핍의 투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과연 우리 시대의 절망을 직시하고 있는가. 경멸과 조롱이라는 피난처에서 시대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탑승한 시내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버스 안의 승객들은 서로를 보고 듣고 인식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와 우리의 모든 이웃들이 이 절망의 터널을 지나 함께 하차할 세상이 오길 바라는 내 마음속에 노래가 던지는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https://www.youtube.com/watch?v=jxwo0sm8O0g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장르 포크/블루스
동방명주, 대륙 가는 배가 반도를 떠나는구나
샛별 하늘
저배는 황해 달빛 부서지는 바다로 나가다
멀리 임당수 처자 치맛바람에 슬쩍 숨는구나
어여 가자. 일엽편주야 단둥 항구에 들어가면
낯익은 여인네들 서울 가자고 기다린다
동방명주, 대륙 가는 배가 반도를 떠나는구나
화려한 연안부두
저 배는 장산곶 마루 북소리에도 깜짝 놀래여
멀리 산둥반도 수평선 파도 너머로 슬쩍 숨는구나
어여 가자, 일엽편주야 단둥 선착장으로 들어가면
조선말로 어딜 가오 널 기다리며 묻는구나
돈 벌어서 언제 오나요 허, 심란하게 묻는구나
혀를 차며 서로 묻는구나
2. 동방명주 배를 타고
중국 남부와 대만 등지에서 사용되는 민속악기 얼후의 간드러진 선율에 맞추어 시작하는 [동방명주 배를 타고]는 앨범의 초기 트랙에 위치한 곡으로 뒤로 갈수록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10집 앨범에서 조금은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는 곡이다. 동양풍의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멋들어진 연주가 일품인 이 곡의 배경이 되는 동방명주는 한중 수교 이후 개설된 인천발-단둥행 국제 여객선의 이름이다. 반도를 떠나 대륙으로 향하는 여객선이 가져다주는 풍류를 감상하다 보면 청자는 어느새 노래를 따라 단둥항구에 도착한다. 서울 가자고 외치는 익숙한 여인내들이 목소리. 노래는 21세기에 들어 자본주의 생존 경쟁에 뛰어든 중국 동포들의 모습과 조우한다. 동방명주란 중국의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상하이의 랜드마크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자본시장에서 상품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인지되지 않았던 새로운 존재들이다. 넌지시 던지는 반가운 조선말, 돈 벌어서 언제 오나요. 언제나 소외와 차별에 시달리는 주변인을 찾아 대변해 온 정태춘의 시야는 이제 황해와 산둥반도 너머에 있는 남루한 현실에까지 미친다. 나라 잃어 조국을 등져야 했던 이들의 후예들이 바로 그 조국에 팔려가듯 돈 벌러 오는 새 시대의 모습을 노래는 어딘가 애잔하게 담아낸다. 그가 일생 동안 변호해 온 반도의 일생들이 100여 년 전 헤어진 대륙의 애달픈 사연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점은 세월이 흘렀어도 돈과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밀려난 약자들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역사의 진리를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1세기의 첫 번째 사반세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남한에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혐오와 조롱의 의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족 출신 이민자 또는 체류자들이 저지르는 강력범죄에 대한 뉴스는 한국형 느와르 영화의 단골소재가 된 지 오래이고, 그들의 오만과 무례, 비위생과 무책임 등을 지적하는 인종주의적 텍스트들은 한국의 온/오프라인 공간을 지배하는 주류담론이다. 그런데 지금도 커뮤니티에서 얼굴도 본 적 없는 조선족들을 비하하고 있는 이들은 1990년대 중후반에 난무했던 한국인 브로커에 의한 조선족 입국 사기사건들이 아직도 조선족 이민 1세대들에게 회자되는 끔찍한 기억임을 알까. 전직 대통령의 조선족 살인범 변호 행적을 조롱하기 위해 페스카마호 사건을 소환하는 극우 커뮤니티들은, 그 선원들이 사실상 납치 피해자들이며 임금도 지불받지 못한 채 지속적인 구타와 협박에 시달리는 인권유린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특정한 몇 가지 사건을 환기시켜서 자성을 촉구하는 계몽적인 글을 쓰고자 함은 당연히 아니다. 그들에 대한 맹목적인 온정과 비호가 정당하고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드러낸 수십/수백 년에 걸친 분쟁이 그러하듯 이제 와서 선후를 따지고 경중을 재서 판정승을 받아내는 것은 서로 간의 감정의 골을 다시 확인하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저 조선족이 아직 중국 동포로 불리던 그 시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여인네와 만나 반가운 조선말을 한 번 들어보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 내 인생에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포 친구가 생긴다면 [동방명주 배를 타고], 이 노래에 담긴 그들의 애환과 우리들의 슬픈 역사를 안주 삼아 한 잔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생겼을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xlf0uwyiDE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장르 포크/블루스
때때론 '양아치'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그는
하루 종일을 동그란 플라스틱 막대기 위에 앉아
비록 낮은 방바닥 한 구석 좁다란 나의 새장 안에서
울창한 산림과 장엄한 폭포수, 푸르른 창공을 꿈꾼다
나는 그가 깊이 잠드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 가끔
한쪽 다리씩 길게 기지개를 켜거나 깜빡 잠을 자는 것 말고는
그는 늘 그 안 막대기 정 가운데에 앉아서 노랠 부르고
또 가끔 깃털을 고르고, 부릴 다듬고 또, 물과 모이를 먹는다
잉꼬는 거기 창살에 끼워 놓은 밀감 조각처럼 지루하고
나는 그에게 이것이 가장 안전한 네 현실이라고 우기고 나야말로
위험한 너의 충동으로부터 가장 선한 보호자라고 타이르며
그의 똥을 치우고, 물을 갈고 또, 배합사료를 준다
아치의 노래는 그의 자유, 태양빛 영혼 그러나,
아치의 노래는 새장 주위로만 그저 뱅뱅 돌고...
그와 함께 온 그의 친구는 바로 죽고, 그는 오래 혼자다
어떤 날 아침엔 그의 털이 장판 바닥에 수북하다 나는
날지 마, 날지 마 그건 너의 자학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너의 이념은 그저 너를 깊이 상처낼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정말 날고픈 하늘을 전혀 본 적 없지만
가끔 화장실의 폭포수 소리 어쩌다,
창 밖 오스트레일리아 초원 굵은 빗소리에
환희의 노래처럼 또는, 신음처럼 새장 꼭대기에 매달려
이건 헛된 꿈도 이념도 아니다라고 내게 말한다 그러나,
아치의 노래는 새장 주위로만 그저 뱅뱅 돌고...
내일 아침도 그는 나와 함께 조간신문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침마다 이렇게 가라앉는 이유를 그도 잘 알 것이다
우린 서로 살가운 아침 인사도 없이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가족 누군가
새장 옆에서 제발 담배 좀 피우지 말라고 내게 말할 것이다
아치의 노래는 그의 자유, 태양빛 영혼 그러나,
아치의 노래는 새장 주위로만 그저 뱅뱅 돌고...
아치의 노래는
3. 아치의 노래
한세월을 시대의 일대기를 담아내는데 열중해 온 정태춘의 심연에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자기혐오가 있었다. [아치의 노래]는 그런 정태춘의 내면을 그가 기르는 아치라는 이름의 잉꼬를 통해 표현했다. 아치라는 이름의 모티브가 되는 양아치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가 넝마주이이듯, 시종 사회의 부적응자와 비주류인으로 살아온 그는 좁은 새장 안에서 울창한 산림과 푸르른 창공을 꿈꾸는 잉꼬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이 날고 픈 하늘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는 이건 헛된 꿈도 이념도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건 자학일 뿐이라는 걱정 섞인 또는 연민 어린 대답일 뿐이다. 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새장 속의 일상은 그의 똥을 치우고, 물을 갈고, 배합사료를 주는 그가 탈출하고픈 그 세계의 도움으로 오늘도 유지된다. 이것은 정태춘과 그의 삶과 사상을 위태롭게 지켜보고 있는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비유이면서, 또 언제까지나 뜻을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낸 뒤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상화된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세계에 흡수되어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은 납득되지 않고 세상과 떨어져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서 정태춘이 느끼는 것은 아마 고립감, 부끄러움, 자기 연민 같은 것들. 그럼에도 생각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아집, 어떤 신념, 두려움 때문이리라. 마치 새장을 두드리는 잉꼬의 부리가 내는 소리처럼 그의 내면에서부터 들려오는 상념들이 청자의 마음에 콕콕 박혀간다. 세계와 부딪치는 것은 언제나 괴롭다. 그러나 진심을 다해 부딪치지 않는다면 벽은 언제나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혁명은 시기상조이다.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현실과, 현실이 힘들수록 우리를 더 잡아당기는 이상 사이의 길항을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인물상은 꺾이지 않는 고집과 신념으로 무장한 사상가나 왕조의 부흥운동을 이끄는 생존자, 기울어져 가는 학풍의 명맥을 잇는 계승자들이었다. 나는 변절과 전향이 싫었다. 나이를 먹는 동안에 내가 변하면 어쩌나. 나이를 먹는 동안에 너처럼 썩어버리면 어쩌나. 가끔 뉴스를 볼 때마다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직도 버니 샌더스나 제러미 코빈, 백기완 같은 늙은 좌파들을 생각할 때면 내 심장은 두근거린다. 허나, 세상이 바뀌어가는데 자신만 그대로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가능할까. 전체의 일부이면서 초월자 흉내를 내는 것은 급진이 아니다. 그것은 자폐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세상의 많은 중년들은 급진주의자였던 20대를 훈장처럼 자랑한다. 이상주의자였고 열정적이었던 청년은 이젠 현실적이고 현명한 어른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한가.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던 자신의 젊음이 남길 유언은 그것뿐인가.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우리들의 노년이 조금 더 고단했으면 좋겠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후퇴와 유보를 반복하고 있을지라도, 정신은 늙고 지킬 것은 많은 노인이 되는 것을 자랑스레 여기지는 말자. 이상과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나의 새장 속에서도 아치의 노래는 흘러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fHQdCt5CTJs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편곡 박만희
장르 포크/블루스
영화는 끝나고, 내 핸드폰엔 콜이 하나
네가 거기 꿈의 궁전 마루 바닥에 쓰러진 뒤 음, 나는
극장 지하 주차장에서 나의 딸과 나의 아내
승용차에 태우고 집으로 집으로 오, 그리곤
내 방 오디오로 아주 오랜만에 슬픈, 오 슬픈
그리스의 노래를 음,
마리아 파란 도리는 애절하게 그의 조국의 비극을 노래하고
너의 주검이 다시 내 눈앞에 빙빙 돌고
그날 오후엔 올림픽 공원 펜싱 경기장 전교조 합법 화 기념대회
넓은 마루 높은 무대, 그 수 백명의 풍물 소리 오,
끝도 없이 입장하는 전국 지회, 지부 깃발들과
열광하는 박수 함성, 승리의 노래가 오,
일만 여 젊은 교육 노동자들의 뜨거운, 뜨거운 노래를 들으며
나는 무대 뒤에서 하염없이 울고
한 여교사가 그의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천천히 음향석 콘솔 앞을 지나가고
리철진 동무, 그래
마지막 날 동해 가던 그 승용차 뒷좌석
예쁜 화이 뺨 위의 눈물 자욱을 백미러로도 못 보고 음,
뿐만 아니라 여기,
남한에서 내가 보았던 너무나 목매여 뜨거운
그 많은 눈물들도 음,
행사 끝난 공원에선 교사들이 밀려나오고
그 북적대는 인파 속에 네 뒷모습이
지방 대절 버스에 올라타는 도종환 시인의 뒷주머니에
깊이 꽂혀 펄럭이는 종이 깃발...
그 너머 음.
4. 리철진 동무에게
노래 [리철진 동무에게]는 영화 <간첩 리철진>을 본 정태춘의 하루를 서글픈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주법과 아코디언, 바이올린 선율에 담아 영화 속 장면과 교차해서 보여준다. 꿈의 궁전에 쓰러진 리철진의 모습을 뒤로한 채 극장을 빠져나온 정태춘은 그리스의 민중가수 마리아 파란 도리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주검을 떠올린다. 그날 오후 오랜 숙원이었던 전교조 합법화 기념대회에 참석한 그는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다시금 안타까운 리철진의 최후와 뒷모습을 발견한다. 북한의 식량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파된 대남 공작부 요원 리철진이 남한에서 여러 가지 감상을 느끼다 종국에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영화의 장면들은 마치 편집증 환자의 그것처럼 정태춘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재구성된다. 정태춘이 변해가는 한국사회로부터 느끼는 위화감은 전철역의 노숙자들과 압구정의 젊은이들, 서울의 교통체증에 당황하는 리철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노래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 그는 리철진에게 자신과 같은 주변인으로서의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분단 체제에 이용당하고 희생된 리철진의 비극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그 현실은 우리의 일상 어디에나, 심지어 축하와 희망의 행사장 곳곳에도 감추어져 있다. 국가와 이념을 관통하여 은폐된 진실을 직시하는 정태춘의 하루에는 잊히고 지워진 평범한 비극들이 망령처럼 횡횡한다. 감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현실에서 되살리는 서사력의 힘이 놀라운 노래이다.
남한의 국력이 북한 사회를 명실상부하게 압도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는 오랜 화두가 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서울의 어느 세미나장에서는 정처 없이 유랑하는 북한의 꽃제비들과 탈북자들의 기억에 의해 복원된 정치범 수용소의 끔찍한 인권유린이 스크린을 통해 비치고 있을 것이다. 탈북민들이 사연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북한 사회의 실태와 본인의 파란만장한 탈북 에피소드를 토크쇼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종편의 각종 TV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탈북 콘텐츠를 산업화하였다. 프로그램의 주 시청자들인 중장년층들은 낙후된 북한 사회의 모습과 생계에 천착하는 탈북민들을 통해 향수와 우월감을 느끼고, 출연자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앞다투어 과거 자신의 조국을 비하하고 비루한 자신을 전시한다. 나는 이 노예적 신파가 남한 사회에서 일종의 전리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북한 이탈주민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끔찍한 반인권의 소굴로 재입북하는 탈북자의 숫자가 지난 10년 간 수십 명이나 되고, 왜 남한에 정착한 그들의 자살률이 남한 사람의 세 배나 높은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분단체제가 안겨주는 멍에는 목숨을 걸고 넘은 휴전선 건너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시대의 리철진들은 남과 북 모두에서 착취되고 유린된다. 나는 [리철진 동무에게]를 들으며 이 비극의 현현(顯現)을 목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Y17iFYqt5o
작사 정태춘
작곡 정태춘
장르 포크/블루스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 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사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고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나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에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봄날 언덕길로
십자가 높은 성당 큰 종소리에
거기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고 있겠니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그쳐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5.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이 앨범의 마지막 곡인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 우리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정태춘과 박은옥의 문답을 만난다. 눈물 같은 빗줄기와 차도에 나부끼는 전단지를 뚫고 오는 막차를 바라보며 아직 오지 못한 너를 떠올리는 박은옥은 처연한 독백을 남기고, 언젠가 찾아올 첫차를 기다리며 정류장을 배회하는 정태춘은 초록의 봄날 언덕길을 약속한다. 여기까지 정태춘의 음악 여정을 쫓아온 청자라면 투명한 유리창과 햇살 가득한 첫차, 초록의 봄날 언덕 길이 의미하는 청명한 희망을 찾기에는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수 부부는 세상과의 소통과 미래에 대한 기대의 의지는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혼돈과 상실을 묵묵히 견디어 내고 있는 두 사람의 자전적인 독백은 무겁게 내려앉는 아코디언 전주 위에서 남아 있는 자신의 벗들에게 건네는 연대의 몸짓이자 소박한 위로가 된다. 정태춘은 이 노래를 발매한 뒤, 문명열차에서 뛰어내렸다고 말하면서 고작 그 비상구 앞에 무기력하게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현재의 자신이라고 자조적인 말을 남긴다. 이제 다시 버스정류장 앞에 선 그는 회한의 시대 속에서 세상에 대한 환멸을 잠시 유보한 채 희망의 새 시대를 향한 그 오랜 기다림을 시작했다. 끝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상주의자의 비장한 각오에 정태춘 음악의 정수(精髓)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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