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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생각7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나라 -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나라 · 어느 민주 묘역을 나오며 작금의 사태가 벌어지기 한 달쯤 전, 약속이 있어 강북지역에 들렸다가 우연히 4.19민주묘지에 방문했었다.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4월 혁명은 이 나라 민주화 운동의 유구한 역사에서 선구적인 입지에 놓여있다. 실제로는 아시아적 전제의 권좌에 앉아 겉으로는 서구적 민주주의라는 풍문만을 들려주며 민주정을 참칭했던 시대에 그들은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민주 공화정의 가치를 지키고자 일어났다. 주권을 자각하는 시민이 아니라 피지배에 익숙한 신민이 국민의 절대다수였던 이 어둠의 시대에 혁명의 주체는 전적으로 새 시대의 주인인 청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간 쌓여온 배움에 대한 뿌리 깊은 민족적 갈망과 사대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지사적(志.. 2024. 12. 22.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엔 보통 약속을 잡아 천안 터미널에 간다. 어릴 적부터 역마(驛馬)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이 있어 걷는 것이 좋고 차량으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좋아한다. 일단 여정을 시작하면 타지가 주는 낯섦과 설렘,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길들, 알 수 없는 사연들이 가득한 세계 속으로 내 몸을 밀어 넣는다. 차창 너머 다가오는 세계는 시야 속에서 단숨에 빨려들어 오는 듯 보이지만 그 세계의 의미는 유랑자를 붙잡지 않고 그대로 흘러간다. 움직이고 있는 동안 그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애매한 상태가 된다. 세계가 몸을 붙잡지 않고 몸이 세계에 매달리지 않으니 흘러가는 동안 세계는 사유나 증명의 범주를 벗어나 그저 경험되어진다. 일상에서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자유란 .. 2024. 11. 28.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모든 회사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이것은 구조적이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감과는 다르게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가 구성원의 노동력을 사는 것은 그의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그에게 주는 임금보다 많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단어 그대로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지불된다면 구태여 회사가 노동을 구매할 이유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착취는 정상적인 상황으로 전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을 계약한 대로 주지 않거나 법적 최저 임금보다 적게 주는 경우는 착취가 아니라 절도 혹은 사기 같은 반자본주의적 행위다. 누군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탐욕스럽고 난폭한 비인격적 자본가의 행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아무리 선량한 자본가라 할.. 2024. 9. 23.
-사람이 떠나야 할 때 -사람이 떠나야 할 때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한 사람은 맹인과 다름이 없이 감각만으로 주변을 인식한다. 여기는 적진의 한복판인가, 베어야 하나? 아니면 그 동안의 악업들이 만들어 낸 인벌인가, 견뎌야 하나? 그도 아니면 진부한 신파극인가, 울어야 하나? 음울한 직감들이 무엇 하나 개운치 않은 결론만을 남긴 채 원념이 되어 내 몸을 관통해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엔 유령들처럼 옛꿈들이 날 원망하며 서있다. 생각이 생각을 좀먹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한 가지. 여기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제 와서는 떠나올 집도, 돌아갈 고향도 떠오르지 않는다. 고향과 뿌리를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이름 모를 향수는 남아서 삶을 이다지도 우습게 만들고 있을 뿐. 내면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른 무형의 .. 2023. 10. 16.
-기도로 살며 -기도로 살며 여느 때처럼 감정의 잔여물을 게워내며 머릿속에 비망록을 쓴다. 도피와 모면의 방어 기제(機制)에 익숙해진 나머지 요즘은 무언가 성취감이 들어도 감흥이 없다. 매일같이 인파에 휩쓸리고 관계에 포위되어 살다 보면 상처받을 일은 많아도, 감동받거나 위로받을 일은 점점 줄어든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란 걸 알기에 나는 괴로워하기보단 음악을 듣는 편이다. 그렇게 무작위 자동 재생의 향연 속에서 부유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귓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는 본 조비(Bon Jovi)의 기도로 살며(Livin' on a prayer)였다. 거기서 나는 오랜만에 심심한 감동을 느꼈다. 애초부터 천성이 이리 생겨먹은 나는 누군가 그 음악이 좋은 이유를 물어도 바로 답하지 못하고 기원과 계보부터 따지게 된다.. 2023. 10. 16.
-누가 나에게 이 길을 -누가 나에게 이 길을 벼랑 끝에 매달린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는 언젠가 절벽 끝에서 본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착각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하고 말이다. 뭐가 되었든 간에 지금 이 시점에서 사학자라는 내 지향을 저울에 올려놓고 나머지 한 쪽에 전망, 생계, 가족 같은 단어들을 올려놓고 있자니 별로 좋은 얘기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미 예전에 퇴로를 다 불사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간혹 나타나는 수많은 잡념들에 나는 아직 일희일비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린 날의 치기인지 노인네의 아집인지 모를 마음이 역사를 붙잡고 끝내 놓아 주질 않는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한 적도.. 2023. 10. 16.
-쓸모 있는 바보 -쓸모 있는 바보 우연한 계기로 에릭 홉스봄의 짤막한 전기 하나를 읽었다. 나는 본시 노인을 좋아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해박함과 초연함이 그들의 지닌 최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그 노인이 19세기 전체사 서술의 기념비적인 거장이면서 그 생애 자체로 지난 세기 시대의 증인인 자라면 어떠하겠는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게걸스럽게 그의 삶과 그에 대한 진술을 탐독해 나갔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단어 하나와 뜻하지 않게 재회했다. 그것은 내게 어떤 상념 하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글을 읽거나 쓸 때, 말을 듣거나 할 때, 생각을 할 때조차도 냉소와 역설을 찾아다니는 버릇이 있다. 제 나름의 의분이나 문제의식도 있고, 그걸 목표나 이상이라 부르고 싶은 공명심과 호승심.. 2023.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