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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생각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나라

by 양조휘 2024. 12. 22.

-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나라

 
· 어느 민주 묘역을 나오며
 
 작금의 사태가 벌어지기 한 달쯤 전, 약속이 있어 강북지역에 들렸다가 우연히 4.19민주묘지에 방문했었다.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4월 혁명은 이 나라 민주화 운동의 유구한 역사에서 선구적인 입지에 놓여있다. 실제로는 아시아적 전제의 권좌에 앉아 겉으로는 서구적 민주주의라는 풍문만을 들려주며 민주정을 참칭했던 시대에 그들은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민주 공화정의 가치를 지키고자 일어났다. 주권을 자각하는 시민이 아니라 피지배에 익숙한 신민이 국민의 절대다수였던 이 어둠의 시대에 혁명의 주체는 전적으로 새 시대의 주인인 청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간 쌓여온 배움에 대한 뿌리 깊은 민족적 갈망과 사대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지사적(志士的) 전통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인 난민촌의 고등학생들을 민주 열사로 성장시켰다. 원초적인 의분을 참지 못해 거리로 나온 학생들을 주축으로 부끄러움에 합류한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 참혹한 진압의 현장을 목도하고 즉자적으로 뛰어든 노점상과 지게꾼 등 함께 스러져간 모든 숭고한 영령들이 정의의 불꽃과 민주의 뿌리가 되어 이 묘역에 잠들어있다. 이 나라 헌법 전문 첫 줄에 국민의 저항권을 상징하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이라는 한 구절을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는가. 묘역 곳곳에 새겨진 비문과 군상 부조를 지나 참배단 앞에 서서 이제는 역사의 한 조각이 된 압제와 저항의 시대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헌화했다. 정말 그런 줄로만 생각했다.
 
· 내란의 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밤, 우리는 이 묘역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있었어야 할 망령들의 공포스러운 재림을 경험했다. 12월 3일 22시 25분경 대통령에 의해 계엄이 선포되었고, 35분 후인 23시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의회와 정당의 활동, 결사·집회·시위 등의 모든 정치활동 금지, 언론·출판 통제, 파업·태업·집회행위 금지, 의료인의 본업 복귀 등이 내용에 담겼다. 이에 불응 시 계엄법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및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14조에 따라 처단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었다.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을 통해 나온 이 초현실적인 문장들에 모두가 당혹스러움에 빠져있을 무렵, 계엄군들은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를 급습했다. 야당을 종북세력 및 국체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으로 명명한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국회 상공으로 헬기가 날아들고 대테러부대가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침투하자 시민들과 야당의 당직자들이 이를 막아섰다. 계엄법 제11조 1항에 따라 계엄의 해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 의결 절차가 실행될 수 있도록 15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본회의장에서 표결을 완료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국회의장과 야당 대표는 국회의 담을 넘었고, 경찰에 가로막혀 고성으로 항의하는 야당 의원과 계엄군의 총구를 잡고 분개해 하는 야당 대변인, 야당의 보좌관이 뿌린 소화기에 주춤하는 계엄군의 모습 등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급박하게 돌아갔던 계엄 정국은 12월 4일 1시 1분경 국회에서 마침내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 처리됨에 따라 2시간 1분 만에 법적 효력을 상실했으며, 같은 날 오전 4시 26분경 대통령실에서 계엄 해제를 발표하고 오전 4시 30분 국무회의 의결로 계엄 해제를 선포함으로써 약 6시간 만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예상치 못한 기상악화로 인한 계엄군의 초기 투입 지연 및 중간급 이하 군 간부들의 낮은 명분과 동기, 시민들의 신속한 계엄군 저지, 그리고 학생운동 경험이 풍부한 야당의 다수 의석이 삼박자를 이루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 헌정사에 크나큰 비극이 되풀이 되었을지 모른다. 제6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계엄령이자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마지막 계엄선포로부터 44년 6개월 18일 만에 일어난 전국단위의 비상계엄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그 신속한 진압과 시대착오적 대담함 때문에 풍자와 조롱의 영역에서 소비되고 있는 12.3 내란 사태가 일단락된 지금 사태의 전말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하나회 숙청 이후 사라졌던 군내 사조직에 대한 트라우마는 충암파란 이름으로 부활했고,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대표 및 주요 정치인 체포 명단과 이들을 연행하여 구금할 수도방위사령부 내 B1벙커의 존재가 입증되었으며, 본인에게 반기를 들었던 여당 대표에 대한 사살 명령설과 유력 진보 유튜버 및 반정부 성향의 특정 직역만을 지정하여 제거하려고 했다는 점 등이 회자 됐다. 일국의 대통령이 특정인에 대한 유아적 적개심과 부정선거 음모론 및 진영 논리적 대안 세계에 심취하여 이 같은 국가적 혼란을 획책하였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선 기념비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내란의 진압 직후 수세에 몰린 대통령은 열흘에 걸쳐 총 네 차례의 담화를 통해 탄핵과 구속 직전에 몰린 현행범의 구차하고도 뻔뻔스런 억지와 궤변을 늘어놓았다. 계엄은 야당에 대한 경고 조치에 불과하며 통치행위의 일환이라는 수괴의 당당함이 시민들을 다시금 거리로 나오게 했다. 불의와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화의 역사가 탄핵 가결을 염원하는 응원봉을 영매삼아 시대를 밝히는 불빛으로 되살아나 여의도 앞 광장을 수놓았다. 내란 방조 및 공범으로서 내란수괴인 대통령과 운명공동체가 되었다고 판단한 여당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결사반대하며 옹위했지만, 한 차례 불성립했던 탄핵안은 민심의 거대한 분노를 동력 삼아 결국 국회의 문턱을 통과했다.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첫 번째 탄핵안 통과가 좌절되었던 날,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던진 화두가 이처럼 적절한 순간이 없었다. 다시 한번, 이 나라 민주열사와 민주주의 역사 앞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결국 내란을 획책한 대통령은 탄핵을 통한 정치적 처벌과 내란 및 군사 반란죄라는 법적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부역자인 정부와 군경의 핵심들도 마찬가지로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거다. 최소한의 정국 수습 의지와 집권 세력으로서의 양심과 책임을 방기한 채 내란 수괴를 옹호하고 있는 여당도 민란에 가까운 민심의 분노에 직면해 있다. 그들의 저항과 도주 과정은 지저분하고 다소 모욕적이기까지 하겠으나 그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업이기도 하다. 끓어오르던 분노의 파고가 잠시 가라앉자 그 아래 무겁게 깔려있던 참담한 자괴감이 고개를 든다. 우리는 이제, 이미 과거에 준엄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박물관에나 전시되어 있어야 할 자들이 어떻게 오늘날까지도 이 나라의 국정을 맡고 있었고 지금과 같은 반역사적인 망동이 가능했느냐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내란의 밤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 집권 전사(前事)
 
 대통령 윤석열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는 극적이었다. 그는 2013년 초, 보수정권의 국정원 댓글 개입 수사 당시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정권에 위협이 되는 수사를 밀어붙이다가 좌천된 이른바 소신 있고 강단 있는 검사로 정치면에 처음 데뷔한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으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대통령을 향한 특검 수사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자 야당과 국민 여론은 정권에 가장 강력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할 검사를 필요로 했다. 한직인 여주지청장으로 쫓겨나 있던 윤석열은 그 적임자로서 특검의 수사팀장으로 발탁된다. 돌아온 탕아, 화려하고도 정당한 복수. 국정농단에 신물이 나 있던 국민들은 열광했고, 수사팀장 윤석열의 수사와 기소는 연일 매스컴을 장식했다. 윤석열 주도의 국정농단 수사팀은 경제공동체, 제3자 뇌물, 묵시적 청탁 등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쟁점들을 엮어내어 헌정사 최초의 대통령 탄핵과 정권 실세들에 대한 유죄 선고라는 성과를 올리며 성공한 특검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다. 보수 일각에서 특검 수사팀의 전례 없는 법리 해석 및 적용이 위법적이고 무리하다는 항변을 했지만 대세에 영향을 주진 못했다. 마침내 무너진 정적들의 정치적 주검을 보는 야당의 눈에 절제된 검찰권 행사라는 가치는 지엽적인 문제처럼 보였고, 분노한 민심은 역사의 심판이라며 흡족해했다.
 
 새롭게 들어선 민주당 정권에서 윤석열은 서울 중앙지검장으로 영전한다. 사법연수원 기수를 한참 뛰어넘은 파격인사였고, 국정농단 수사의 연장으로서 새 정권의 적폐청산 수사를 총지휘하라는 정권 차원의 선택이었다. 소위 윤석열 사단이라고 불리운 중앙지검 휘하의 특수부 검사들은 약 2년간 대략 2천여 명에 가까운 보수인사들을 수사했고 그 가운데 200명 가량이 구속 수감되었다. 전직 기무사령관을 비롯한 5명의 인사는 그 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을 통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여세를 몰아 사법농단 수사로 현직 판사를 구속시키는가 하면, 또 한 명의 보수정당 출신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는 등 윤석열 검찰의 수사는 거침이 없었다. 무자비한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던 윤석열은 2019년 7월 검찰총장에 임명된다. 3년여에 걸친 적폐수사에 대한 피로감이 대두되고 비대해진 검찰권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점차 커질 무렵이었다. 안정적 지지율에 취해있던 민주당 정권은 부랴부랴 검찰의 수사·기소권 분리와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 설치라는 검찰개혁의 청사진을 본격화한다. 같은 해 9월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지명된 법무부 장관을 전격적으로 압수수색 하면서 검찰총장 윤석열은 이 같은 정권의 노선변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이 그에게 씌워놓았던 정의로운 검사라는 허울이 벗겨지는 순간이었고 검찰주의자 윤석열의 마각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윤석열 사단의 수사는 과거 특검 수사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피의사실 유포를 통한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 본건의 기소가 어려워지면 주변인과 그 가족들을 털어 죄를 만들어내는 별건 수사 기법, 관례적으로 자제되어 오던 구속영장의 남발 등 특유의 화려한 법 기술은 정국을 일거에 반전시켰다. 절멸의 위기에 몰려있던 보수진영은 70년래 최악의 정치검사라며 비난했던 윤석열의 수사를 찬미하며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언론에는 연일 민주당 정권의 부패와 위선을 직격하고 희화화하는 지식인들과 각계인사들의 우려가 빗발쳤고 그것이 검찰 수사와 함께 사회를 뒤덮었다. 한순간에 벌어진 정치적 역전 세계 앞에서 민주당 정권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동안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밀어붙였던 기득권 세력을 향한 사법적 단죄와 날 선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검찰은 민주당 정권의 약점이 도덕성과 여론 지지율에 있다는 점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보수단체가 고발하면, 검찰이 수사하고, 이를 다시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검찰은 민주당 정권을 사법적으로 무장해제 시켰고, 정치적으로 파산시켰다.
 
 두 정권에 걸쳐 좌우를 공평하게 도륙한 윤석열식 인간사냥은 이윽고 그를 대선주자로 만들기에 이른다. 정치인 윤석열은 정치의 본령인 대화와 타협이라는 대원칙을 정치꾼들 간의 협잡 정도로 여겼고, 과거 정부들의 정책 심사 과정조차 사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했으며, 토론과 질문을 기피 하는 검찰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복수귀가 되어 정치보복에 눈이 먼 보수 야당의 지지자들이 이것을 용납했고, 배신감과 모욕감에 분개하던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판은 진영의 벽에 막혀 전달되지 않았다.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심화됐다. 정치인들 간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설득과 논쟁을 통해 해결해야 할 숱한 정치적 쟁점들과 사회적 갈등은 모두 검찰의 손에 맡겨졌고,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판결에 따라 정치적 일정표가 재편되고 국면이 전환되었다. 정치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법적 처벌의 논리에 잠식되고 사법이 특정인 또는 특정 세력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유화된 세상에서 사상 최악의 대통령 선거는 치러졌다. 정치가 붕괴되고 담론이 실종된 토대 위에서 윤석열은 이렇다 할 공약이나 구호 대신 부동산 폭등 책임과 대장동 게이트, 여가부 폐지 등을 둘러싼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공방을 주도했다. 보수와 진보, 양 진영 간의 증오와 적개심을 양분 삼아 성장한 윤석열이란 괴물은 한국 정치 저변에 깔린 혐오와 냉소를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마침내 대권까지 거머쥐었다. 시대의 비극이고 정치 실패의 결과였다.
 
· 악몽 같았던 949일
 
 만행(蠻行)
 
 윤 정권은 천박하고 잔혹했다. 집권과 동시에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소탈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야심 차게 시작한 출근길 문답은 시정잡배의 대국민 성토장이었다. 내각 초기부터 불거진 장관 후보자들의 도덕성 문제와 후보 시절부터 지적됐던 검찰 편중 인사, 이른바 윤핵관이라 지칭된 측근들에 대한 보은성 인사에 대해 지적이 나오자 대통령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 정권에서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 봤느냐.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를 향해 삿대질과 일갈을 쏟아내는 취객과 같은 모습은 무례한 정권의 민낯을 상징했다. 자신을 향한 비판과 공격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옹졸한 태도는 소위 입틀막 논란을 통해 더욱 확연히 확인되었다. 여야의 국회의원들과 지역주민들이 참석한 한 광역자치단체의 행사장에서 대통령과 악수하며 말을 나누고 있던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 대통령 경호처 직원들에 의해 갑작스레 입이 틀어막히고 다리가 들려 건물 밖으로 쫓겨났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의원의 손에는 날붙이는커녕 그 흔한 피켓 하나 없었고 그가 대통령에게 건넨 말은 국정 기조를 바꾸셔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조언이었다. 비슷한 시기 정권의 R&D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카이스트 졸업생과 의대 정원의 무리한 확대에 반발하는 의사가 같은 방식으로 입이 틀어막혀 쫓겨났다. 대통령의 심기 경호를 위해 한 국가의 언로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천박한 사고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만행이었다.
 
 대통령의 미국 순방 과정에서 벌어진 이른바 바이든-날리면 욕설 파문은 국민을 향한 몰염치와 기만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방송사 카메라를 통해 버젓이 생중계된 동맹국 대통령을 향한 국가 원수의 욕설을 대통령실 대변인이 한국 국회를 향한 욕설이었다고 정정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야당을 중심으로 국회가 반발하고 정중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오히려 이 사실을 보도한 기자의 대통령실 출입이 금지되고, 그가 소속된 공영방송이 외교부 차원의 법적 쟁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람의 청력과 양심마저 권력과 법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오만방자함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본인의 욕설이 정말 국회를 향한 것이었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대통령은 양곡관리법, 간호법을 비롯하여 국회가 통과시킨 본인의 공약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서슴치 않았다. 이외에도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등 쟁점 법안 등은 물론이고, 50억 클럽 특검법과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특검법 등 수사법안에도 거부권을 사용함으로써 대통령 본인과 영부인에 관해 이해 충돌이 발생하는 법안에는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정치 도의마저 무너뜨렸다. 임기 절반 동안 총 25번의 거부권을 사용한 진기록을 세운 윤 정권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의회민주주의에 가장 많은 패악을 부린 정치세력으로 기록될 것이다.
 
 건설노동자를 폭력배로 몰아 대대적인 탄압을 벌인 일은 윤 정권이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지지율 상승의 동력으로 삼고자 벌인 대표적인 악행이었다. 보수언론과 국토부 장관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분신한 양회동 열사의 죽음에 마치 배후가 있고 그 동지들이 자살 방조자인냥 몰아 그 죽음을 욕보였다. 정권은 이 안타까운 죽음에 불법 폭력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고 조금의 희생이 있더라도 노동 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논평을 냈다. 사람의 삶을 빼앗고 죽음마저 고립시켰던 공안정국을 떠오르게 한 끔찍한 일이었다. 정권의 잔혹함은 정부의 안전 불감증과 행정 미비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참사와 이를 대하는 그들의 모욕적인 언행을 통해 각인되었다. 10.29 이태원 참사로 일순간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그 원통함에 못 이겨 거리로 나와 진상 조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목 놓아 외치고 있을 때 그들을 만나러 온 정부 인사는 누구도 없었다. 참척의 고통을 간신히 견뎌내고 있는 유가족을 찾은 건 유족을 향해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극언을 쏟아내며 집회를 벌이던 윤 정권의 지지자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각을 통할하는 이 정권의 국무총리란 자가 추모 현장을 방문하여 참사 유가족들의 항의를 무시하고 그 건너에 있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악수하는 참혹한 장면을 잊지 못한다. 훗날 전직 국회의장이 회고록을 통해 이태원 참사는 정권에 악재를 만들어 내려는 불순세력의 공작 아니었느냐는 대통령의 발언을 공개했을 때, 이 정권이 그야말로 처참히 무너지길 간절히 바랐다. 윤 정권의 인사 중 참사를 대하는 공직자의 본분을 다한 것은 채 상병 사망 수사 외압 사건에서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양심을 지킨 수사단장 박정훈뿐이었다. 정권의 환심을 사고자 수색 경험이 일천한 해병대원을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착용하지 않고 홍수 피해의 현장으로 내몬 사단장은 되려 무리한 수색 작전의 진위를 밝히려는 박정훈 대령을 항명죄로 고발했다. 경위와 죄과가 너무나도 명백한 사건이었으나 상명하복의 군 문화와 법 기술에 익숙한 검찰 정권이 뒷배가 되어 주었다. 홀로 진실을 지키려다 고립되어 굳은 표정으로 법정에 서야만 했던 박정훈에게서 사람들은 질식해가는 이 시대 정의의 단면을 보았다. 사람의 생각과 말을 우습게 여기고, 생명과 양심을 무참히 희롱하는 인간 백정 윤석열의 통치 아래에서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 도둑놈이 몽둥이를 들고 설치고, 잡혀들어가야 할 자들이 외려 사람을 잡아 가두는 상황. 그리하여 언어도단, 의미전도, 상식의 도치와 전복이 매일 반복되는 퇴행과 반동의 시대를 우리는 살았다.
 
 기행(奇行)
 
 윤 정권은 기괴하고 황당했다. 대통령실 비서관에 국정농단 수사 당시 소위 문고리 삼인방이라 지칭되며 권력형 범죄의 수족 노릇을 했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기소하여 처벌케 한 범죄자를 임명했다. 자신이 수사하여 수십 억대의 뇌물 및 횡령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게 한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고,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고 피선거권을 상실하여 선거의 원인을 제공한 구청장을 사면하여 다시 출마시켰다. 유력한 범죄 의혹을 받고 있는 본인의 아내와 이미 법원에서 잔고 증명서 위조로 유죄가 확정된 장모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1심 판결도 선고되지 않은 야당 대표에 대해서는 범죄 피의자를 국정 동반자로 인정할 수 없다며 적대시했다. 대통령 개인의 호오에 따라 사법부가 공들인 판결은 공허한 헛말이 되기 일쑤였고, 대통령의 사면권은 왕조 시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초법적으로 사용되었다. 정치적 경륜이나 사회·경제적 식견은 부족하지만 적어도 엄정한 법 집행이라는 원칙만큼을 지켜질 것이라 기대했던 지지층의 일부조차 당혹스러워했다. 법조 출신 대통령이 이끄는 검찰 정권이 국가의 법질서와 법 원칙을 가장 손쉽게 무너뜨렸다는 역설은, 윤석열이란 자를 필두로 한 이 나라의 법조 엘리트들이 사실은 법을 얼마나 우습게 알고 스스로를 법 위에 존재하는 법조 귀족이라 생각하고 살아왔었는지 실천적으로 입증하였다. 이런 자가 공정과 상식을 구호로 당선되었다니, 참으로 기이하고 황당한 일 아닌가.
 
 이 정권 내내 대통령 영부인 김건희의 행보에는 항상 기묘한 추문과 시끄러운 논란이 따라붙었다. 대통령 부부가 영국에 국빈 방문하였을 당시 일정이 충분하였는데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조문을 하지 않은 것은 영부인에게 조언한 무속인 때문이란 의혹이 돌았다. 캄보디아 순방 때에는 심장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아를 들어 올린 뒤, 마치 피에타를 연상케 하는 연출된 자세로 사진을 찍어 배포해 빈곤 포르노라는 빈축을 샀다. 이외에도 나토 정상회의에 민간인 비선을 동행한다거나, 리투아니아 방문 시에는 명품관에 들려 쇼핑을 즐기는 것이 외신에 포착되어 망신을 당하는 등 국정 최대 걸림돌이 영부인이라는 자조적인 반응이 여당에서 나왔다. 점입가경으로 영부인이 본인의 사택에서 명품백과 고급 양주를 건네받는 영상이 공개되어 야당과 여론의 총공세가 퍼부어졌지만 법적 처벌은커녕 사과나 재발 방지의 약속조차 없었다. 정권의 힘이 빠져갈수록 영부인의 교양 수준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나 주변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폭로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영부인의 화류계 시절 행적을 안다는 사람부터 주가조작 공범들의 자백까지, 그녀를 이 나라의 얼굴로 감당해야 하는 국민들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국격은 끝없이 추락했다.
 
 장님 무사와 앉은뱅이 주술사. 이른바 명태균 게이트를 통해 대통령과 영부인의 막후조력자이자 정권의 최고 실세로 밝혀진 명태균은 그 둘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대통령의 철학 부재와 영부인의 국정 개입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이 전근대적인 비유에서 알 수 있듯, 평론가들은 이제 정치학 교과서가 아니라 무속과 주술에 정통해야 했고 쏟아지는 음모론의 진위를 논쟁해야 했다.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과 관련해서는 천공스승이란 영부인의 멘토가 개입했다는 둥, 건진법사라는 또 하나의 유력자와 도력과 법력을 겨루다 실각했다는 소문이 도는가 하면, 대통령 관저 공사의 수의계약을 맺은 21그램이라는 의문의 업체명이 과거 서구권에서 유행했던 영혼의 무게설을 차용한 것이라는 억측도 나왔다. 자신이 대통령 부부와 친분이 있다는 온갖 법사와 도사, 스승들이 등장하여 각 지방의 건설업자와 부동산업자들을 유혹했다. 하루가 멀게 터져 나오던 대통령과 영부인의 녹취록을 통해 그 실체가 점차 확인되면서 이와 같은 소문의 상당 부분이 진실이었다는 믿기 힘든 현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했다. 국가의 공적 권위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권력자와의 사적 친소관계를 독점한 개인에 의해 정부 여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놀아나고 있었다는 기괴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가 부족 국가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의 구중궁궐 안에서 눈과 귀가 가려진 대통령 부부를 이용하여 근본 없는 잡놈들이 약탈하듯 이권을 나누어 갖고 국정을 희롱하는 엽기적인 시대였다.
 
 무능(無能)
 
 윤 정권은 무능하고 어리석었다. 혹자는 그 행태에 대해 요구조건이 없는 항공기 납치범에 빗댔다. 애초에 추진하고자 하는 의제나 정책이 없었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집단이었다. 당연히 야당과의 협상을 통해 다듬어지거나 절충될 법안 같은 것도 없었고 모든 국정 방향은 즉흥적이거나 편향적이었다. 교육에 관한 관심이 올라가는 입시철에는 대통령이 나와 급작스레 사교육을 비판하며 수능에 출제되는 소위 킬러 문항을 삭제하라 하라 지시하였다가 교육계의 혼란을 야기했다. 총선을 앞두고 부산 경남 지역의 민심 이반이 걱정되자 열세가 분명한 부산 엑스포 유치를 장담하다가 29표 : 119표라는 처참한 결과와 함께 엄청난 국고 손실을 자초했다.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 시추의 가능성이 확인되었다며 호들갑을 떨며 대왕고래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계획을 경솔히 발표하였다가 얼마 가지 못해 채산성이 극히 낮고 분석에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사실상 흐지부지되기도 하였다.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납치범의 위험한 비행 때문에 인질로 잡힌 국가는 늘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도를 넘어선 무능이 계획적인 악행보다 국가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정권을 통해 재확인됐다. 북한의 무인기가 군사 분계선 인근을 넘어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 영공을 유유히 침범하는 동안 군은 격추는 고사하고 추적조차 실패했다. 자신들이 혈맹이라고 추켜세우던 미국의 정보 당국이 우크라이나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전략을 수집하기 위해 대통령실을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별다른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이 나라의 안보와 국방이 허술하고 위태로워지는 동안 정권은 국군의 날 기념식과 같은 개선 행사에 집착하고 경호처의 인력 충원과 권한 강화 등 병정놀이에 취해있었다. 새만금에서 열린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행사 부실 운영으로 인한 사고는 이 정권의 행정적 무능을 상징했다. 한여름으로 계획되어 있는 행사장에 피서용 쉼터 설치 미비, 온열질환에 대비한 의약품 구비 부족, 샤워실과 화장실 등 기본적인 위생 시스템 부실이 원인이 되어 8천여 명에 달하는 부상 및 질병 피해자들이 속출했고 설상가상으로 태풍까지 불어닥쳐 조기 퇴영이 결정되면서 대회는 처참히 실패했다. 전문가와 야당이 위와 같은 잦은 사고와 부실한 국정 운영에 대해 문제 제기할 때마다 정권은 이를 정쟁으로 몰고 가거나 해당 지자체의 책임으로 뒤집어씌우는 무책임한 방식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윤 정권이 초래한 의료대란 사태는 앞서 설명한 그 모든 무능의 사례들과 견주었을 때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의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했다. 낮은 지지율과 업적 쌓기에 초조해진 정권은 향후 5년간 매해 2천 명씩 의대 정원을 증원하고 필수의료 수가 등을 조정하는 급진적인 의료개혁안을 발표했다. 증원될 의대 신입생을 교육할 시설과 인력 충원 문제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비현실적 조치였고, 폭발적으로 늘어날 의료인들 간의 영업 경쟁과 이로 인해 발생할 이해 당사자 간의 갈등과 혼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계획이었다. 당연하게도 의사와 전공의, 의대생들이 집단적인 반대 행동에 나섰다. 전공의들의 대량사직,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 및 소송, 현장 의료인력들의 진료행위 거부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면서 의료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황을 타개하려는 정치권과 의사들 사이에 여·야·의·정 협의체 출범이 끝내 불발되고 정권과 의사단체 간의 끝없은 대치가 장기화되면서 의료행위를 받지 못한 고령층을 중심으로 1,700명에 달하는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다. 무능한 정권의 오판과 아집에 전시·사변에 준하는 숫자의 국민이 죽어 나갔고, 의료 시스템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 정치적 아둔함에 있어 윤 정권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젠더 갈라치기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당선에 기여한 일등 공신이며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 자당의 30대 당 대표를 단지 사감 때문에 성 상납 의혹이라는 누명을 씌워 불명예 퇴진시켰다. 정권의 분열을 누구보다 바라던 야당조차도 의아해했다. 덕분에 그를 중심으로 40·50 진보동맹으로부터 이탈해 60·70 보수세력에 합류했던 20·30세대 남성층의 이른바 세대 포위 전선은 무너졌고, 윤 정권의 지지기반은 눈에 띄게 취약해졌다. 민심의 이반이 심각해질수록 정권은 야당탄압에만 골몰했다. 제1야당의 대표를 필두로 야당의 최고위원과 전직 대표, 개별 의원들의 정치적 발언이나 사소한 관행까지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렸고 야당을 잠재적 범죄집단쯤으로 여기는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태도가 지속되었다. 이 정권을 끝장내지 않고서는 정치적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한 야권은 장외의 시민·사회단체와 점차 결합하며 정권퇴진 운동에 앞장섰다. 총선 무렵이 되자 보수언론과 여당 대표까지 나서서 국정 쇄신을 건의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선거 막판 대파값을 둘러싼 민생·물가 논란을 일으키며 안 그래도 불리했던 판세에 쐐기를 박았다. 그 과정에서 검사 시절 부하이자 정권의 황태자로 불리던 여당 대표와도 원수지간이 되었다. 압도적 정권 심판론이 지배한 선거 결과는 당연히 개헌선이 위협받을 정도의 여소야대였고, 대통령이 범죄자 혹은 사기꾼으로 매도했던 다수의 정치인들이 정치적으로 부활 및 복권되었다. 하나같이 윤석열과 악연으로 엮인 인물들이 국회 제1·2·3·4당의 대표가 되었으며 특검과 탄핵이 일상적으로 발의되는 극한 대립의 정치 환경 속에서 정권은 민심과 국회에 포위된 채 농성하는 반란군과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22대 국회는 정치적 금치산자 윤석열의 정치 난동을 제어하고 통제하는데 아까운 역량을 사용해야만 했다. 정말 중요한 민생·경제와 관련된 법안이나 미래세대를 위한 진지한 논의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났다. 윤 정권이 존속되고 있다는 자체가 역사에 민폐였고 국민의 짐이었다.
 
· 이재명이라는 알리바이
 
 윤석열 정권 천일 간의 악행, 그 이면에는 항상 제1야당 대표 이재명에 대한 호명이 있었다. 그에게 족쇄처럼 씌워진 이른바 사법 리스크는 정부 여당의 가장 유력한 무기였다. 여야 영수 회담과 여·야·정 협의체를 거부하는 이유로 언제나 범죄 피의자 이재명이 소환됐고, 채 상병 특검과 김건희 특검 등 집권 세력에 대한 수사 위협이 닥칠 때면 이재명 방탄이라는 역공을 펼쳤다. 총선 기간에 정권 심판론의 열기가 거세지자 이재명·조국을 심판하자는 이·조 심판론이란 해괴한 구호로 맞섰다. 지난달 그의 선거법 위반 유죄 선고와 위증교사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가 일주일 간격으로 엇갈리자 지지자와 반대파로 나뉜 법원 앞에는 절규와 환호가 교차했다. 심지어 사상 초유의 내란 사태가 벌어지고 자신이 뽑은 대통령이 탄핵 되어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는 지금에도 여당의 지지자들은 여전히 이재명의 집권만은 안 된다며 내란수괴를 옹호하는 중이다. 이처럼 이 정권은 정치인 이재명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와 거부감을 확대재생산 함으로써 자신들의 유일한 정당성과 알리바이를 유지하려 했다.
 
 윤 정권은 3년간 총 5개의 재판과 15개의 혐의로 이재명과 그 주변을 300여 차례에 걸쳐 압수수색 했으나, 그들이 주장한 차명계좌와 같은 결정적 물증은 나오지 않았고 재판장에는 검찰이 제시하는 정황과 구속당한 피의자들의 의심스러운 증언만 난무했다. 다수의 재판은 아직 1심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재명은 윤 정권 내내 죽음의 위협에 놓여있었다. 정권의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그의 피의사실을 줄줄 읊으며 망신을 주고 이재명의 사법 리스크에 도매금으로 쓸려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민주당의 국회의원들이 그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 시켰을 때, 법원이 그 구속영장을 기각하지 않았다면 사법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총선 국면에서 온 언론이 1심 선고도 채 나오지 않은 이재명의 범죄 혐의를 유죄 추정의 원칙으로 확정된 듯 떠들고 정부 여당이 그 막대한 자원과 역량을 쏟아부어 펼친 이·조 심판이라는 기상천외한 여론전이 먹혀 선거에서 패배했다면 정치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아니, 극우적 세계관에 심취한 희대의 정치 테러범 김진성의 칼날이 이재명의 목에 1센티미터만 더 깊숙이 박혔더라면 이미 물리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악랄한 정치보복의 연속이었고, 정적에 대한 악마화를 통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졸렬한 통치술이었다.
 
 비열한 정치보복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해서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집권 당위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외려 보복의 피해자가 증오를 이기지 못해 또 다른 보복의 연쇄를 낳을 수도 있고, 이를 내적으로 극복하더라도 이미 극렬한 대립 구도 속에 자리매김해 있는 이재명이라는 존재 자체가 국민통합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안타깝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도 엄연히 존재한다. 정치인 이재명의 궤적과 한계는 뚜렷하고 지금의 정치적 조건 속에서 그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성공할 확률이 썩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재명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확정적 중범죄자도 아니지만 약속된 구세주도 아니다. 다만 그가 지난 천일 간 악몽 같았던 윤 정권을 함께 견디어낸 생존자이자, 내란의 신속한 진압을 위해 시민들과 더불어 제 역할을 다한 훌륭한 제1야당 대표였다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의 총구 앞을 지켰던 사람인 이재명이 내란수괴와 비견되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제부터 정권의 모든 악행과 12.3 내란이라는 초유의 반헌법적 쿠데타를 이재명에 대한 호오로 환원하여 모든 논의를 그 안에 가둬두려고 하는 내란 수괴와 내란 동조자들의 술수가 시작될 것이다. 그럴싸한 양비론도 넘쳐날 것이다. 검찰 독재와 친위쿠데타의 생존자가 그 난동의 원인이라는 궤변으로부터 마이크를 빼앗자. 내란의 본질을 감추고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배격하자. 이재명이란 이름 뒤에 숨어있던 자들이 누구였는지 똑똑히 기억하자.
 
· 검언(檢言)유착이라는 배후
 
 윤석열이 일으킨 12.3 내란의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난무한다. 고질적인 알코올 중독증이나 분노 조절 장애, 포악한 성향과 극우적 망상과 같은 정신병리학적 접근부터, 87년 헌법이 내재한 한계라며 개헌 필요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들이지만 모두 본질에서 벗어난 지적이다. 전자는 대통령 개인의 인격적 결함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많은 가담자와 옹호 세력이 현존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고, 후자는 초유의 비상계엄이 헌법상의 권한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 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반헌법적 행위였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윤석열이라는 함량 미달의 인간이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하고, 어떠한 견제와 감시도 없이 그 비상식적 통치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부당한 힘의 근원. 검찰과 언론이라는 막후 조력자의 존재를 제외하고서는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진 뒤 검찰과 언론은 과거의 부역 행위를 반성하고 쇄신하라는 차원에서 검찰 독립과 언론 자유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세례를 받아, 권력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라는 민주주의 파수꾼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진전되며 거의 모든 행정부의 권력기관이 개혁과 청산의 대상이 되어 쇠락하는 동안, 검찰과 언론은 오히려 그 권력의 진공상태를 이용하여 힘을 길렀다. 검찰 독립과 언론 자유는 선출된 공직자의 민주적 통제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하는 명분으로 악용되었다.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위해 존재하는 두 기관은 어느새 스스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누리는 권력 집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검찰과 언론은 쌍둥이처럼 닮아갔다. 전자는 기소권을, 후자는 편집권을 무기로 사건을 만들고 사람을 재단했다. 둘 모두 취조실과 언론사 데스크라는 밀실에서 일을 꾸미고, 조직 구성원 간의 의리를 강조하며, 본인의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고위층의 피의자와 취재원을 상대하며 스스로 같은 계급이 된 듯한 착각 속에 산다는 점도 비슷했다. 그 알량한 권력이 쥐어준 펜대에서 나온 기소장과 헤드라인 몇 줄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른 한 사람의 인신을 구속하고 법정에 세워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사회적 흉기가 되고, 일면식도 없는 유력 정치인이나 인기 연예인에게 증오와 적개심의 낙인을 찍어 수십 년간 이어질 혐오를 퍼뜨리는 전령 노릇을 하는 모습은 우리 시대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국정농단 사건과 조국 사태를 거치며 이 막강한 힘을 과시한 두 기관이 대통령으로 낙점한 것이 윤석열이었다. 대검 총장 시절부터 검찰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해온 검찰의 식구였고, 피의자와 검찰 캐비넷에서 나오는 온갖 특종을 통해 언론과 밀월관계를 맺어온 정치검사의 대부라는 점이 선택의 이유였을 것이다. 윤 정권 내내 검언유착 세력의 숙주로서 정권이 그들의 권력과 이권을 보호해주면, 검찰과 언론은 권력의 주구로서 충실한 수족 역할을 해주었다. 명백한 부정이 밝혀져도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니 법정에 세울 수 없었고 되려 지적하는 쪽이 잡혀들어가니 법에 의한 통제는 유명무실했고 임기 시작부터 끝까지 불법을 숨 쉬듯이 저지를 수 있었다. 논란과 실정이 반복되어도 언론이 편집하고 축소 시켜 정쟁과 양비론으로 둔갑시키니 민심의 분노는 조직되지 못한 채 와해 되었고 여론에 의한 통제도 불가능했다. 이것이야말로 윤석열이 취약한 정치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유력정당의 대선주자가 되고, 본인과 부인, 장모를 향한 숱한 의혹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으며, 집권 이후에도 별다른 제동 없이 폭력적 권력 행사를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구조적 기반이었다.
 
 만약 검찰이 제1야당 대표 배우자의 법인카드 10만 4천 원의 유용 여부를 밝히기 위한 70여 차례의 압수수색에 쏟은 정성의 절반에 절반만큼이라도 영부인의 300만 원 명품백 수사에 진심을 보였다면 영부인과 연루된 끝을 모르는 비리 의혹을 진즉에 끊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언론이 대통령 부부의 기괴한 언행이 남긴 녹취록과 폭로가 나왔을 때, 제보자를 무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심층취재와 후속보도를 했다면 정부 여당의 거의 모든 인사들을 입맛대로 요리하고 이를 통해 창원 산단의 이권을 취하려 했던 정치 브로커 명태균 같은 자가 감히 대통령실에 접근할 수 있었을까. 하물며, 야당의 국방·안보 전문가들이 군 내부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계엄선포의 조짐이 있다는 첩보가 돈다며 경고했을 때, 이를 국민을 바보로 아는 선동이라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그 위법성을 의심하여 초동수사에 나서고 언론이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다뤘다면 어처구니없는 계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탄이 계속되는 지금에도 검언은 제 살길을 찾아 바쁘게 태세 전환하고 있다. 이제 검찰은 위기에 몰린 스스로의 존립을 보장받기 위해 사냥터의 전리품이 된 윤석열과 그 잔당들을 물어뜯을 것이다. 언론은 윤석열 부부와 내란 동조자들의 사소한 동정이나 자질구레한 일거수일투족부터 숨겨진 비화까지 전부 파헤쳐 비판하고 지적함으로써 그동안의 부역 행위를 면피하려 들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다시 제2, 제3의 윤석열을 옹립하여 권력을 농단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강상(綱常)의 도를 어긴 사람은 용서해도 정명(正名)의 교를 어지럽힌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 그 판단력을 앗아가고 종국에는 12.3 내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가능케 한 검찰과 언론의 죄과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 광장 밖의 국민
 
 내란의 밤을 가로지르는 상념의 마지막 종착지는 결국 다시 국민이다. 이 나라 국민들의 평화적이고 대중적인 집단행동은 항상 경이로웠다. 2002년 미선·효순 양의 미군 장갑차 사망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반미라는 민감한 사안이 결부되어 있었음에도 촛불이라는 영성적·제의적 사물을 매개로 하여 모두의 공감대를 이끌어낸 대중집회였다. 2004년 봄을 달군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는 곧은 정치인의 수난이라는 서사에 촛불이 더해져 강자의 횡포에 희생된 의인의 생환을 바라는 시민적 기원의 형태를 띠었다. 2008년 여름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는 건강, 생명이라는 안전 문제에 불통 정권에 대한 정치적 불신이 결합해 폭발한 경우였다. 2016년 겨울부터 펼쳐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백만의 시민들이 탄핵이라는 제도적 해결책을 스스로 선택해 구 정권을 붕괴시키고 대치 정국을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2024년 12월, 비상계엄을 규탄하고 윤석열 탄핵을 성사시킨 응원봉 집회는 앞선 집단행동의 문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평가될 것이다. 계엄 사태로 사라질 뻔한 나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 위한 동기로 단일대오를 강요하지 않고 다원화된 개인들이 연대했다는 점과 K-POP의 상징과도 같은 응원봉이 집회 도구의 주류를 이루어 이념·사상적 동원을 완전히 초월했다는 점이 그 질적 갱신을 의미했다. 그것은 모 정치인의 표현처럼 진보된 시민의 역량을 보여준 빛의 혁명이었고 슬픈 아름다움이었다. 국민은 이렇듯 정치에 무감하고 때로 어리석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복잡하게 난립한 정치적 난맥을 단숨에 압축하여 정리하고 궤도를 이탈한 민주주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비상한 재주를 지녔다.
 
 허나 국민에 대한 찬사만으로는 오늘의 현실을 절반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국민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작금의 혼란을 초래한 원흉 가운데 국가를 총체적으로 파괴한 윤석열이란 광인, 무력하고 약점투성이였던 야당, 알량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권을 옹립한 검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재앙의 앞단에는 윤석열을 투표를 통해 승인한 국민이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에는 윤석열에 투표한 절반의 국민들이 있으며, 아직도 그 지지를 철회하지 않거나 여의도에서 일어나는 집회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국민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60·70 고령층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축은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부끼며 내란수괴의 귀환과 야당 대표의 척살을 외치며 내란 잔당들의 위헌·위법적 야욕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여당이 당론으로 탄핵을 반대할 수 있도록, 탄핵이 가결된 후에도 헌법재판관 임명과 내란 및 정부 여당에 대한 특검을 저지할 수 있도록 압박과 응원을 보내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비상계엄을 찬양하는 글을 올렸다가 일자리를 잃고 이제는 광화문 집회의 연단에 올라 호객 중인 뮤지컬 배우도 있고, 공개적으로 계엄을 반대하는 발언과 행동을 한 유명 연예인에게 테러 위협을 가하는 자도 있다. 참담하게도 여론조사 상으로 집계되는 이들의 숫자는 국민의 2할에 달한다. 다른 한편에는 20·30 남성을 중심으로 충격적인 계엄 사태에 분노하여 윤석열로부터는 완전히 이탈하였으나 야당과 진보적 요구에는 반감을 갖거나 판단을 유보하여 거리로 나오지 않고 있는 쪽이 있다. BBC 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여의도 집회에 참석한 20대 여성과 남성의 성비에는 약 5배가량의 격차가 있다고 한다. 군 복무 등을 고려한다 해도 유의미한 차이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연배의 지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윤석열에 분노하지만 그 집회에는 내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정치 자체가 혐오스럽고 와닿지도 않아 내란 가담자들의 폭로를 그저 매트릭스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촌극 정도로 웃어넘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답답하고 속이 타지만 모두 현실이다.
 
 초기의 설렘과 열광 뒤에는 초조와 불안, 결국 찾아오는 낙담과 환멸의 시간. 기시감이 드는 이 익숙한 실패의 주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계엄조차 바꿔놓지 못한 이 완강한 증오와 무관심이 어디에서 왔는지 고민해본다. 민주주의의 광장을 부정하고 계엄의 광장으로 나간 사람들, 광장이 자신을 소외시킨다고 느껴 자신만의 밀실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광장을 벗어난 국민의 일원에게 어떻게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의 규칙을 적용하여 동등한 권리를 나누고 자신이 저지른 결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참 힘들고 난망할 일이다. 윤석열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과제가 이토록 크고 무겁다. 여의도 광장에 울려 퍼지던 다시 만난 세계는 정말 찾아올까. 흔들리더라도 고민을 멈출 순 없다. 적대하고 냉소하는 서로 다른 세계의 국민들이 진정으로 화해하고 서로 다른 그대로 연대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것이 내란의 진정한 종식이고 윤석열 시대에 대한 완전한 청산일 것이다.
 
 
2024 / 12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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