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떠나야 할 때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한 사람은 맹인과 다름이 없이 감각만으로 주변을 인식한다. 여기는 적진의 한복판인가, 베어야 하나? 아니면 그 동안의 악업들이 만들어 낸 인벌인가, 견뎌야 하나? 그도 아니면 진부한 신파극인가, 울어야 하나? 음울한 직감들이 무엇 하나 개운치 않은 결론만을 남긴 채 원념이 되어 내 몸을 관통해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엔 유령들처럼 옛꿈들이 날 원망하며 서있다. 생각이 생각을 좀먹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한 가지. 여기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제 와서는 떠나올 집도, 돌아갈 고향도 떠오르지 않는다. 고향과 뿌리를 잃어버린 사람에게도 이름 모를 향수는 남아서 삶을 이다지도 우습게 만들고 있을 뿐. 내면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른 무형의 상실감과 배신감, 그리고 그것들에 집착할수록 커져가는 망향의 감정들이 나의 영혼을 부식시키고 주변을 파괴해나가면서 점점 더 깊은 진창을 나를 끌고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무슨 희망이, 아니 미련이 느껴져서 버리지 못하고 울고 있는 걸까.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을 붙잡고 젖은 손으로 조악하게 그것을 되쌓아 올려도 그저 한줌의 위안조차 얻지 못하면서. 이미 끝났고 잊어버리라는 가벼운 말들 앞에서 내게 가장 진실했던 감정들은 부정되고 거부당한다. 잔인하고 슬픈 얘기들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압축되지 않는 순간이란 것이 있다. 삶을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싶어질 정도로 뻔뻔해질 때도 있다. 그건 끝내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생긴 일이었다. 실연의 달콤함을 홀짝이며 여생을 나무라는 일. 상처는 훈장이 되고 늘어가는 훈장만큼 내 선택은 숭고해지겠지. 모든 쇠퇴와 멸망에는 제 나름의 낭만이 있고,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안도와 쾌감도 있다. 느긋하면서도 착실하게 진행되는 감정의 안락사, 그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나를 보고는 성불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진심으로 슬퍼해 주었다. 어떤이는 무당처럼 굿을 하고 칼춤을 추었다. 제물을 찌르고 작두를 탈 때마다 찢기고 잘려 나간 살갗에서는 피 대신 후회와 자책이 쏟아져나온다. 그래, 너에게 죽은 나를 선물할게. 징그러운 농담을 생각한다. 숙취와 두통, 왠지 모를 수치심이 밀려온다. 너무 많이 들킨 걸까. 세상을 유지하는 건 내 의지도 희생도 아닌 누군가의 무례하고 무책임한 호의에 불과하다는 어설픈 위로를 붙잡는다. 세상이라는 커다란 농담 한 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수룩한 놈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진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냉소해야만 한다. 이때 양지로 끌려 나온 냉소가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무언가 웃기는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농담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유력한 무기가 되는 셈이다. 더는 웃기지 못하고 웃을 수 없을 때가 되면 달려야 한다. 훔친 듯 도망쳐야 한다. 남게 된다면 타인의 삶의 강요받을 뿐이니. 비로소 사람이 떠나야 할 때인 것이다.
2019 / 11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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