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이 길을
벼랑 끝에 매달린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이유는 언젠가 절벽 끝에서 본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착각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하고 말이다. 뭐가 되었든 간에 지금 이 시점에서 사학자라는 내 지향을 저울에 올려놓고 나머지 한 쪽에 전망, 생계, 가족 같은 단어들을 올려놓고 있자니 별로 좋은 얘기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미 예전에 퇴로를 다 불사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간혹 나타나는 수많은 잡념들에 나는 아직 일희일비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린 날의 치기인지 노인네의 아집인지 모를 마음이 역사를 붙잡고 끝내 놓아 주질 않는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한 적도 없었는데.
처음 역사에 대해 생각하던 때를 반추해본다. 역사는 박식하지만 친절하지는 않은 선생님이라는 격언이 있다. 이 말처럼 역사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거대한 묵시를 제공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이해와 주관일 뿐, 역사가 그들을 약속된 진리의 땅으로 인도해 주진 않는다. 만약 그들의 뇌리에 어떤 진리와 운명이 스쳤다면 그 진리를 원한 것도 그 길을 개척하는 것도 결국 역사가이고 인간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란 예언자(預言者)와 구도자(求道者)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예언과 구도는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또 누군가에게는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 역사가에 대한 정의다. 나는 이렇게 믿으면서 나의 껍데기뿐인 인생에 억지로 역사라는 소명의식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인간의 생애를 역사의 좌표 위에 올려놓고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또 하나의 자아가 생겨났다. 인간의 생애는 오직 역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그 많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기로 결심한 날, 이 길이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례자의 길에 발을 딛게 된 나에게 초행의 설렘은 짧았고 동행자에 대한 갈급함은 길었다. 길 위에서 역사의 이름을 쉬이 참칭하고 이를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려 하는 사람은 많았다. 안타깝게도 그들 가운데 내가 찾던 동행자는 없었다. 역사에서 길을 구하려는 자는 없었고 역사라는 권위에 안주하려는 자는 차고 넘쳤다. 길 위에서 만난 비열한 협잡꾼들과의 지난한 싸움은 나의 신심을 더욱 독실하게 하려는 예정된 시련이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나를 회심과 배교에의 충동에 빠지게 했다. 협잡의 몽롱함이, 침묵의 안락함이 나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나는 출사표를 쓰는 것이 두려워졌고 진정한 핍진성은 오로지 회고록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길의 인도자로서 의지와 확신을 멀리하고 번민과 회의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전사의 결의나 서생의 문제의식 사이에서 영광스런 고립을 유지하는 것이 혼탁한 세상을 피해 역사 앞에 악업을 쌓지 않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다.
신과의 결속을 스스로 끊어내고서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에 방황하는 불신자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대학이었다. 이미 예전에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고상한 지위를 제 발로 걷어찬 것으로도 모자라 제 발로 기업의 이윤창출이나 장사치의 현실감각 따위를 가르치는 공간이 되어버린 곳에서 그런 사람들과 만난 것은 의아함에 앞서 커다란 고마움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나는 학파나 사조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접했고, 스승과 동료라 여겨도 민망하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역사에 관한 추체험을 나눌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은 새 시대의 첫 차를 맞이하는 두근거림 대신 구시대의 막차를 떠나보내는 듯한 묘한 아련함을 남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적지 않은 애정과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역사에서 길을 구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길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었다. 나는 망해가는 왕조를 사랑했지만 왕조의 능참봉으로 늙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숭고한 일이었지만 나의 길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물론 그중에도 예외는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시대라는 단어 속에 가두기에는 너무 특별한 낭중지추 같은 인물이 있다. 내가 대학에서 만난 그 사람은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다신 없을 초시대적 존재였다. 역사의 길 위에서 투쟁의 진지를 찾아 홀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던지는 투사. 사람들이 자신에게 추방형을 선고하면 외려 나머지 모두에게 금고형을 선언해버리며 미련 없이 길을 떠나는 디오게네스. 나와 나의 세상을 역사에 종속시키지 않고, 역사를 스스로에게 종사시키는 주체적 인간. 나는 그와 깊은 교감을 나누면서 그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길을 구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 구속과 길의 논리를 초월하려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유미주의 미술 속 악마적 천재의 불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와 그 사이엔 서로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채워질 수 없는 깊은 골짜기 하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나와 그 사이의 관계에 일종의 암묵지처럼 쌓여서 해소되지 않을 긴장과 낯섦으로 남았다. 나는 다시 혼자였고 동행의 조건은 턱없이 높았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어떤 종족에는 사춘기에 이른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떠나 광야를 헤매게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는 전통적 의식으로서 젊은이에게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자아를 확인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그 방황에서 젊은이는 영적인 존재를 만나고 그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일생 동안 그의 내면에 감추어 있는 비밀이 된다. 그럼으로써 이름은 한없는 깊이를 지닌 그의 자아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자아의 이름을 받지 못한 소년으로 떠돌고 있다.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다시 영원히 고독한 이 길 위를 바라본다. 그동안 내 안에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을 떠올려본다. 또 한 번 긴 터널을 통과한 듯한 이 기분은 뭘까. 어느샌가 손에 들린 기로의 가려움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직은 다 모르는 저 길 어딘가 견디어 낸 아침이 기다릴까. 나는 그렇게 눈을 감고서 다시 한번 자아의 깊이와 길의 무게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2019 / 02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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