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바보
우연한 계기로 에릭 홉스봄의 짤막한 전기 하나를 읽었다. 나는 본시 노인을 좋아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해박함과 초연함이 그들의 지닌 최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그 노인이 19세기 전체사 서술의 기념비적인 거장이면서 그 생애 자체로 지난 세기 시대의 증인인 자라면 어떠하겠는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게걸스럽게 그의 삶과 그에 대한 진술을 탐독해 나갔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단어 하나와 뜻하지 않게 재회했다. 그것은 내게 어떤 상념 하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글을 읽거나 쓸 때, 말을 듣거나 할 때, 생각을 할 때조차도 냉소와 역설을 찾아다니는 버릇이 있다. 제 나름의 의분이나 문제의식도 있고, 그걸 목표나 이상이라 부르고 싶은 공명심과 호승심 따위도 있는데 현실이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자 지레 포기해버리고 그 탓을 세상으로 돌린 까닭이 아닐까 싶다. 이유 없이 솟아올랐던 울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사그라들고 그 낙차만큼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리고 나는 정신적 조로증에 걸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의 역사와 인간을 긍정할 만큼의 뻔뻔함도, 빨갱이가 될 용기도 없는 놈이었다. 그렇게 뿌리 깊은 고아 의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십대를 허송세월로 보냈다. 나는 자학과 자기 파괴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 중에 하나가 되어있었다.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은 보통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회주의 용어다. 한눈에 보기에도 냉소와 역설로 그득해있는 이 단어는 자본주의 사회를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내심으로는 공산주의를 동경하고 응원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비웃기 위해 쓰였다. 그러나 비단 그것이 정치적 지향에 대한 냉소만을 담고 있을까.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열정과 변혁의 근본을 건드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고뇌를 숭고하게 여기는 이율배반적 지식인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통해 위로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기 파괴적 쾌락을 어떤 고매한 자기성찰쯤으로 포장하고 있는 괴물을 보는 것 같아 괴롭다.
그러다 생각을 멈추고 고갤 들어보면, 세상은 좀 더 천박하다. 이 나라는 봉건, 식민, 분단, 독재 그 무엇 하나 온전히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 나라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빨갱이가 나올 수 없다. 대신 그 빈자리는 양심이나 상식 같은 지극히 규범적이고 온건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채운다. 그들은 결코 체제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 못한다. 이 체제 내부의 반대자들은 오히려 체제를 더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갱신하고 향상시키는 것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이 정도의 생각에 좌경·종북·빨갱이란 딱지가 붙는다. 인간에 대한 선의와 미래에 대한 소박한 상상조차 불온한 음모로 둔갑하는 이곳에서 그들은 결국 위악(僞惡)의 길로 내몰린다. 그들은 기꺼이 좌파의 탈을 쓰고 불온한 존재를 연기한다. 역사에 대한 추상적인 부채감, 사회적 상식을 대변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좌파라는 명예로운 십자가를 지게 된다. 이 나라에서는 악역을 맡고 순교자가 되는 것이 너무 쉽다. 쓸모 있는 바보들이라는 조롱도 너무 쉽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던 그 단어의 무게는 어느새 시정잡배들의 질 나쁜 농담만도 못하게 추락해버린다.
이렇게 체념과 회한의 밑바닥까지 침잠하고 있는 나에게도 뜨거워지는 사람이 하나 있다. 80년대에는 누군가의 변호인이었다가 나중에는 대통령이 된 그의 별명 또한 공교롭게도 바보다. 돈벌이 가 쏠쏠한 조세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민주투사로, 반미면 어떻냐는 말로 세상을 뒤집어 놓은 후보 시절 모습에서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체결로 배신의 독배를 마시는 과정에까지 그의 인생 궤적에는 매력과 한계가 분명하다. 가장 한국적인 자수성가의 궤도에 올라선 그때 제 발로 투사의 길로 들어서고, 가장 비주류적인 경로로 대통령이 되어놓고 주류를 끝내 설득하고 이해해보려 버둥거렸던 인간. 항상 자신이 몸담고 있던 진영과 이해관계의 바깥을 개척하고 품고자 했던 그야말로 현실과 이상 그 어느 것에도 반역하지 않고자 고민하고 두려워 한 쓸모 있는 바보들의 전범(典範)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운명했다. 물리적인 상처가 아니고서야 사람은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한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허락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그들의 책임을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는 끝까지 세상이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나는 그에게서 비극적 운명을 직감하고서도 이에 맞서 결연히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 희랍비극의 주인공을 본다. 좌파가 되기 이전에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무엇일까를 더 처절히 성찰했던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의 제목은 진보의 미래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가 스스로를 정의했던 그 쓸모 있는 바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자조적이지 않게 다가왔다.
그렇다. 이것은 나의 정치적 지향에 관한 선언이다. 그리고 내 생에 드문 자기 긍정의 시도이기도 하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사람들은 그의 시대를 다시 한번 부활시켰다. 그들이 만들 쓸모 있는 바보들의 시대에 내가 또 하나의 바보로서 기대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감히 긍정한다. 지금 그가 남기고 간 그의 친구와 동지들이 자코뱅과 로베스피에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라쿠스 형제가 그랬던 것처럼 두 번째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들을 지지한다. 이것이 자본과 차별, 경쟁의 논리를 벗어난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을 동경하는 나의 고약한 소신이다. 그것이 내가 이 시대에 공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이제 나의 정치적 지향을 긍정하고 나의 사상적 결핍을 사랑해본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살아보고자 한다. 지금처럼, 아주 나쁜 취향으로다가.
2019 / 01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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