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모든 회사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이것은 구조적이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감과는 다르게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가 구성원의 노동력을 사는 것은 그의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그에게 주는 임금보다 많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단어 그대로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지불된다면 구태여 회사가 노동을 구매할 이유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착취는 정상적인 상황으로 전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을 계약한 대로 주지 않거나 법적 최저 임금보다 적게 주는 경우는 착취가 아니라 절도 혹은 사기 같은 반자본주의적 행위다. 누군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탐욕스럽고 난폭한 비인격적 자본가의 행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아무리 선량한 자본가라 할지라도 무한한 이윤 추구와 성장 욕구라는 자본의 속성을 피해갈 수 없다는 필연성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을 인격화하여 호오(好惡)의 감정을 투영하려는 일은 아주 아둔하거나 간사한 사람을 통해서만 벌어진다. 노자가 자연에 대해 말했듯 자본은 인간을 그저 추구(芻狗)와 같이 여긴다.
일생을 이런 생각을 가진 채 살아오던 한량이 이 나라 착취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위치한 회사에 몸담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정서적 이방인이 됐다. 계약 기간 동안의 활동을 관리하고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멘토와 언제 임금과 근로조건에 따라 퇴사를 결정할지 모르는 계약직에게 최대한의 노동을 시키고픈 부서 정직원들의 내심도 동기동창들로 이루어진 신입사원들의 담합구조도, 그들의 순전한 악의가 아니라 자본의 한 얼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만사가 떨떠름한 부적응자로 현생을 마치고픈 것은 아니기에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하릴없이 널브러져 있던 인간관계는 조금씩 정리되어 가고 칭얼대듯 비웃었던 직장인들에 대한 존경도 나름 생겼고 그저 그런 일상이 주는 소중함도 한 움큼, 그리고 그네들로서는 심각한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고민이나 자못 진지한 자산 형성계획 같은 것에도 표정을 낭비해본다. 그러다 괜스레 찾아오는 아쉬움에 나도 무언가 물어보려 질문을 찾다가 결국 혼자 분열하다 붕괴한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세상은 이렇게 낯설다. 무리에서 도태되는 것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초식동물의 그것처럼 정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보통 사람이 되고자 모두가 치열히 노력하는 직장에서 일하게 된 지금도 그렇다. 회사라는 역할극이 유지되기 위해 자기기만이 큰 덕목일진대 나는 지진아에 가깝다.
무노조 경영을 최대의 치적으로 삼아오던 이 회사에 노조가 생긴 지 서너 해가 되어가는 올해 중반 노사위원 선출을 위한 투표가 있었다. 늘 그렇듯 무상한 얼굴로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내게 파티션 너머로 빼꼼하고 튀어나온 얼굴이 말을 걸었다. 기호 3번입니다. 한 표 부탁드립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걸어오며 사탕을 건네는 데 당황해서 시선을 아래로 돌리니 불꽃이라는 노조명 밑에 충분한 성과에도 외면받은 우리라는 구호가 쓰인 점퍼가 보였다. 답례로 그날 간식으로 나왔던 약과를 주려 찾다 보니 이미 그는 옆 파티션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공교롭게도 점심시간 식당에 가면서 자연스레 회사 내에서 석 달째 이어지고 있는 금속노조의 작은 시위행렬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요즘 사람들이 손쉽게 말하는 시위 무용론, 정치적 관점으로 볼 때 실익이 없고 여론의 확성기로서도 유용하지 못하며 강경 진압을 유도하여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그렇고 그런 말들이 오갔다. 만져지지도 않고 마땅하게 호명되지도 못하는 어떤 이의 고통이 이 세상 한구석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란 쉽지 않다. 분명한 물리량을 가진 충돌은 그래서 필요하다. 사회의 부조리는 경찰 차벽이나 용역깡패의 쇠파이프로 드러나야 하고 소수의 항의는 그 벽과 파이프에 부딪히는 뼈와 살로 체화되어 나타난다. 시위의 존재 의미는 우리가 공유하는 공동세계라는 것이 실재하고 마땅히 분담해야 하는 공동의 고통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는 것 자체인 것이다. 이렇듯 얼른 말꼬리를 잡고 쫓아가 얼굴을 붉히며 드잡이를 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 한 켠에 피어올랐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기서 나는 아렌트가 말했던 세계소외를 떠올린다. 재화에 대한 과시나 욕망을 숨기지 않는 것이 좀 더 쿨한 태도로 보여지고 내면화된 착취가 외부를 넘어 스스로를 향하게 되면 어떤 이데올로기나 도덕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이 공허해진다. 그러한 가치의 공동(空洞)상태는 개인화된 물질적 손익이 메운다. 이제 세상에 내가 먹고 사는 문제의 범주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은 다 거짓이다. 오로지 나의 생존만이 지고지순한 가치가 되고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공동세계가 상실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세계를 버리고 있다.
재화를 축적하고 직장에서 경력을 쌓아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인지상정을 누가 감히 쉽게 경멸할 수 있겠는가. 허나 그 물화(物化)된 자기 계발의 욕구 안에서 더 나은 나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은 철저히 분리, 아니 대립된다. 이 영리한 생존 기계들은 판단이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사회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나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체도 공동선이라는 사회적 이익의 존재도 점차 부정된다. 그 욕망의 기저에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천민 자본주의와 각자도생의 논리만이 도도하게 흐른다. 하여 자기 계발이 목표로 하는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전인적 발전이 아니라 몸값을 높이려는 행위, 총체적 인격으로서 나를 기각하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변태적 행위이다. 자기 계발이 자본주의에서 교양의 최종적 파탄을 상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필 그 사람들의 눈에 각박하고 참혹한 항장의 그것이 아니라 담담하면서도 확신에 찬 복음주의자의 안광이 번뜩이고 있는 것은 왜일까. 이 의문이 나를 두렵고 씁쓸하게 한다.
이런 착잡한 심정으로 퇴근하여 침대에 누우면 이 모든 물질적 조건과 삶의 풍경들이 어쩌면 이렇게 서글플까. 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말하고, 이렇게 말한 것만큼이나 서로 오해하는가. 쉼 없이 만나면서도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한편으론 끝없이 시험해야 하고 또 시험받아야 하는 굴레를 짊어지고서 끝내 소통하지 못하는가. 어쩌면 인간의 삶에는 진보나 퇴보가 아니라 견딤과 겸딤 속의 추구만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하는가.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류의 넋두리를 한참 늘어놓으니 일단 서른 살까지만 살아보라는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꼭 죽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자살징후를 장광설처럼 표출하고 상대방에게 감정노동을 시킨 것처럼 느껴져 조금 웃기고 허탈했다. 아마 서른을 어른이란 말의 동의어로 사용한 모양이다. 하긴 민중을 노래했던 포크 가수가 살아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 나이도, 끝발 좀 날렸던 지식인이 펜을 꺾고 정계 진출을 고민할 만한 나이도, 늙어 가는 게 두려워 죽음을 결심한 어느 소설 속 주인공의 나이도 서른이었으니. 어차피 기대 없는 세상이라면 서른이라는 고도를 기다리며 한두 해를 더 버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은 서른까지 유예됐다. 요즘 나는 모니터 앞에서 점점 침침해지는 눈을 비비며 이렇게 시들어가는 마음을 다독이는 중이다.
2024 / 09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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