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살며
여느 때처럼 감정의 잔여물을 게워내며 머릿속에 비망록을 쓴다. 도피와 모면의 방어 기제(機制)에 익숙해진 나머지 요즘은 무언가 성취감이 들어도 감흥이 없다. 매일같이 인파에 휩쓸리고 관계에 포위되어 살다 보면 상처받을 일은 많아도, 감동받거나 위로받을 일은 점점 줄어든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란 걸 알기에 나는 괴로워하기보단 음악을 듣는 편이다. 그렇게 무작위 자동 재생의 향연 속에서 부유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귓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는 본 조비(Bon Jovi)의 기도로 살며(Livin' on a prayer)였다. 거기서 나는 오랜만에 심심한 감동을 느꼈다.
애초부터 천성이 이리 생겨먹은 나는 누군가 그 음악이 좋은 이유를 물어도 바로 답하지 못하고 기원과 계보부터 따지게 된다. 도무지 메탈 음악의 장르적 문법이라 해석되지 않는 뉴저지 노동 계급의 삶과 사랑의 서사라는 파격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대중성과 상업성으로의 투항, 기업적인 레이거노믹 록(corporate Reaganomic Rock)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신자유주의라 호명되는 레이건 시대의 멍에를 담아냈다는 점이 흡족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번 경우엔 좀 더 진실하게 말하고 싶다. 스스로의 구원을 바라는 자구적 기도와 그 기도로 지탱해가는 삶이라 아름다웠다. 독백하는 기도가 아니라 포효하는 기도라 더 거룩했다. 노래가 표현한 시대의 미메시스(mimesis)로부터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위로를 받아버렸다. 현실에 대한 극한의 추구가 역설적으로 우리를 현실의 초극으로 인도하는 기적과도 같은 상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상과 현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본질적인 두 요소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늘 현실에서 출발하여 이상을 추구하거나 이상에 도달하려 현실의 변화를 시도한다. 자신이 설정한 이상에 근접한 사람들은 그만큼의 만족감을,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의 좌절감을 감당해야 하지만 이상과 현실이 언제나 삶의 서로 충돌하는 지반과 목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현실과 이상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무한히 증식하는 우로보로스(Ouroboros)의 굴레다. 그것은 삶을 숙명적으로 제약하고 그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거나 할애할 수 없게 하는 업보이기도 하다.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현실과, 현실이 힘들수록 우리를 더 잡아당기는 이상 사이의 기묘한 길항. 그 영원한 사투 속에서 절묘한 중용의 지점은 찾으려 길을 떠난 많은 이들의 모습은 대개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바벨탑의 꼭대기를 기어코 밟겠다는 신념이 그랬듯이 도태와 변절의 뒤안길에서 목격되곤 했다. 그게 두려웠던 나는 항쟁의 한복판에서 사실 기도하고 싶었다. 무언가나 누군가, 어떤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가련하게도 삶의 지평에 놓인 이성과 의지 사이의 불화는 존재를 끊임없이 깎고 잘라내는 분재(盆栽)와도 같은 것이라서 어느새 내면의 존엄성마저 망각시키고 만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감히 화친과 항복을 떠올린 병졸의 우매함이 그렇듯이 나를 위한 기도란 사치스러움을 넘어선 불경과도 같았으므로 그것은 나의 숨겨진 치부일 뿐이었다. 나는 더욱 통렬하게 읽고 생각해야 했고, 더더욱 맹렬하게 쓰고 뱉어야 했다. 무언가의 이상을 위해, 누군가의 이념을 위해, 그리고 어떤 세상을 위해. 가혹하게 몰아붙여질수록 정신만큼은 평온해진다고, 마음은 자유로워진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 또한 노예의 도덕에 불과함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평온 속엔 숨겨진 증오가, 분노 속엔 가려진 슬픔이, 체념 속에 구원의 실마리가 남아있다는 걸 몰랐다.
본 조비의 노래가 이 모든 고르디우스(Gordias)의 매듭을 한 번에 베어버렸다고 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허나 이 노래로부터 자기 기만으로서의 충실을 잠깐이라도 멈출 수 있었던 찰나의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면 이것도 기만이라 해야 할까. 삶은 허황될 정도로 짧다지만 세네카는 삶을 제대로 사용할 줄만 안다면, 그래서 그 순간순간을 채울 수만 있다면, 삶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존재의 점유와 존엄의 회복을 떠올리는 감격을 느꼈다. 기도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래서 거기엔 권력도, 논리도, 책임도 없다. 그 모든 것이 형해화되고 사라진 자리에 스스로를 향한 헌신만이 남는다. 이제 나는 이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는 어떤 우울이 찾아올 때마다 꺼내보면서 때때로 위로를 받을 거 같다. 노래 가사처럼 우리가 성공하건 말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 확신과 구원의 가능성은 존재의 최소 조건이다. 나는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이렇게 고해성사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믿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마치 기도하며 사는 것처럼.
2019 / 02 / 22
'나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 (3) | 2024.09.23 |
---|---|
-사람이 떠나야 할 때 (1) | 2023.10.16 |
-누가 나에게 이 길을 (0) | 2023.10.16 |
-쓸모 있는 바보 (0) | 2023.10.16 |